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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림은 음악이나, 시나, 춤과 똑같이 하나의 말이다.

 

말이기 때문에 소통하고 이해하는 도구이며, 사색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도구가 왜 소수 예술가들의 전유물이어야 하는가.

물론 좀 더 치밀하게 파고들어 좀 더 명쾌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필요하다.

삶과 세계와 인간을 증언해주는 걸작은 어떤 시대에든 항상 필요하며, 

자꾸자꾸 거듭 새로운 말로 나와주어야만 한다.

그 작품들이 세계의 본질을 더욱 알기 쉽게 해주며, 

우리 모두를 더 근원적인 진실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도 자신의 말로써, 서툴게나마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일은, 

자기 영혼의 우물로 내려가는 훌륭한 밧줄이 되어줄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건 작지만 중대한 결실이다.

 

그림 그리는 일은 그걸 감상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씻어준다.

또 사색하게 하며, 삶과 세계를 숙고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거창하게 미술치료라는 따위의 새삼스러운 말은 필요치 않다.

원래부터가 모든 예술은 치유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걸 감상하는 일도 그렇고, 만드는 일도 또한 그렇다.

이오덕 님은 모든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글 쓰는 일, 진솔하고 솔직하게 쓰는 일, 

자기 내면의 진실을 파헤쳐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 

그건 바로 영혼을 씻어내는 연습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연습, 거짓말하지 않는 연습, 

있는 그대로를 꿰뚫어보고 인정하는 연습, 

이후에 더욱 현명하고 더 지혜로운 사색으로 파고드는 연습, 

그게 바로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일의 시작이다.

글쓰기로부터 지혜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고, 

아무런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그 관계를 통찰하며, 

모든 고통과 상처와 불안들을 치유하고 승화하여 강해질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혼란과 절망에 빠져 자살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런 사람은 사색으로써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커다란 무기가 있다.

 

그림도 글과 똑같이 하나의 "말"이다.

글은 자신을 속이는 잘못된 버릇에 찌든 사람들이 손쉽게 수많은 덫에 걸릴 수도 있지만, 

그림은 그 무엇보다 솔직할 수밖에 없다.

글은 무게를 잡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겉치장에 빠지는 무수한 구렁텅이가 있지만, 

그림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기가 좀 더 쉽다.

여기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낡아빠진 수법들, 형식화된 가르침들이다.

글 쓰는 사람들이 전문가들의 글을 흉내 내면서 쓸데없는 허세들을 배우는 것처럼, 

취미 화가들도 화가들이나 선배 취미 화가들의 고리타분한 수법에 흔히 빠지게 된다.

어린이들에게는 이런 위험이 없으므로 아이들이 그린 무수한 진솔한 그림들을 볼 수 있다.

피카소나 샤갈 같은 사람들이 어린이 같은 순수한 눈과 

손으로 그리려고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을 했는가.

형식화된 아카데미즘은 오늘날 전근대나 근대풍의 취미회화, 

극사실적이거나 비구상적인 취미회화에서 모던한 추상이나 

설치나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망라하고 있다.

 

세상의 미술학원들이야말로 다 없어져야 한다.

석고 대가리를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입시학원들도 물론 없어져야겠지만, 

취미 화가들을 상대로 드로잉과 유화와 수채화를 가르치는 온갖 학원들이 깡그리 사라져야 옳다.

그런 학원들에서 가르치는 경직된 훈련, 

벽돌이나 원기둥을 놓고 연필로 명암대비를 구분하는 

기초에서부터 시작하는 딱딱한 훈련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문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솔하게 말하는 훈련이 중요한 것이다.

문법만 끝없이 달달 외운 사람들이, 명암법과 원근법, 

형태와 구도와 정형적인 채색법 따위를 훈련한 사람들이, 

이제 지겨운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리는 매우 흔한 일요화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들이 배운 기술은 그들의 삶을 말하는 데 아무 쓸모가 없다.

그들이 그린 설경이나 돌담에 얹혀진 호박 넝쿨이나 주전자가 있는 정물, 

혹은 모던한 재료기법 추상회화가 되더라도 그들의 삶과 무관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그림에는 그들의 말이 없다.

말을 말로써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느 미용실에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미용실 벽 여기저기에 자신이 그린 취미 그림들을 잔뜩 걸어놓았다.

정형화된 흔한 풍경화들, 시골 풍경이나 설경들을 판에 박힌 수법으로 흉내 낸 그림들이었다.

그는 심지어 그런 그림들을 찍은 사진을 모사하고 있었으며, 

잡지에서 오려낸 풍경들을 베끼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미용실에 관한 그림부터 그려보라고 권했다.

그러면 진솔한 그림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위나 머리핀이나 드라이어,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는 아내, 

파마하는 동안 잡지를 뒤적이고 있는 여자들, 

그런 소재들이 얼마나 신선하고 멋진 소재인지, 

또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광경이며 그의 삶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는 대상들임을 알려주었다.

과연 다음에 가 보니 장미꽃을 그린 판에 박힌 정물화였지만, 

옆에 가위가 놓여 있어서 훨씬 그다운 그림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의 충고대로 계속 나아가지는 못했는데, 

불행히도 어느 도시에나 있는 취미학원에 사로잡혀서 

그럴싸한 그림을 그리는 수법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보기엔 자신의 창조성을 싹도 나오기 전에 짓밟는 행위였다.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프로가 유행한 적이 있다.

능청스러운 화가가 나와서 잔재주 피우는 쫑쫑이 화법으로 뚝딱 하고 

설경이나 숲이나 폭포 등등의 이상향이 담긴 이발소그림을 그리는 프로였다.

나도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첫째로 그가 수다스럽게 떠들면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재미있고, 

둘째로 이상향을 담는다는 건 그림의 근원적인 욕구의 하나로서, 

이발소그림은 노골적이고 천연덕스럽게 그 욕구가 살아있는 그림이다. 꼭 평가절하할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에게서 그림을 배운 사람들이 다들 똑같은 

이발소그림들을 그리게 된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것들보다는 아이들 그림이 훨씬 낫다.

아이들은 화면을 겁내지도 않고, 그럴싸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림은 "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남의 말만 흉내 내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그건 애초에 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 말은 진실한 삶에 다가서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물론 화가들은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그들은 보편의 삶, 모두의 삶,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을 말한다.

그들이 신변잡기의 주제나 마치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소재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반고흐나 샤갈 같은 경우에도, 

그들은 자기 존재를 빗대서 인간을, 세계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처음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출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처음으로 그림이나 글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들이 진실할 수 있고,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일 수 있다.

그리고서 손에 힘이 붙고 숙련되고 연마되었을 때, 이제 보편적인 주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그냥 사람, 특정한 장소가 아닌 그냥 산이나 하늘이나 숲, 

특정한 일화가 아니라 그냥 상징으로 처리된 대상들을 

다루면서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말로써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건 세계를 이해하고 사색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말을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않은 것과 똑같다.

진솔한 말이 잘하는 말보다 중요한 것처럼, 진솔한 그림이 잘 그린 그림보다 중요하다.

물론 기교는 날개가 되어준다. 그러나 날지 못하고 있는 그림에서 기교는 오히려 방해물에 불과하다.

쓸데없는 기교가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방해하고 있다면, 그런 기교 따윈 없는 쪽이 훨씬 낫다.

 

화가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아직 어릴 때 그림 그릴 권리를 박탈당한다.

나는 이 점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의 큰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그림 그릴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좀 더 많은 상처와 

좀 더 많은 해소하기 힘든 고통의 앙금을 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자신과 남에 대한 감추어진 폭력성이나 분노나 

콤플렉스로 드러나서 엉뚱하게 굴절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으랴.

 

생각해보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에게나 즐겁고 황홀한, 어린 시절의 이 잊을 수 없는 쾌락, 

그리기의 형태로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며 

사색하는 이 행복을 얼마나 허망하게 빼앗기고 마는지.

취미 화가들을 가르치는 오만가지 잡동사니 미술학원에서와 똑같이, 

교대나 사범대를 나온 숱한 평범한 미술선생들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좌절시키고 있는지.

그들에게 "너는 그림을 못 그려." "너에겐 재능이 없어."라는 말로 

영원히 그림 그릴 권리를 박탈해버리는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말이다.

설령 직접 그렇게 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이 좋아하는 그럴싸한 그림을 만드는 소수의 아이들, 

운 좋게 명암대비나 원근법이나 형태를 모사하는 재주를 가진 

몇몇을 칭찬하는 것으로 나머지 아이들을 좌절시키는 데는 충분하다.

그와 똑같이 우리는 노래 부를 권리, 시를 쓸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얻게 된 것은, 아무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 세상, 

아무도 노래하지 않는 세상, 아무도 시 쓰지 않는 세상이다.

그건 더 잔인하고 더 가혹하며 더 삭막하여, 

서로의 가슴에 쌓여가는 분노와 슬픔과 고통을 가공된 폭력이나 

탐욕의 형태로밖에 출구를 얻지 못하는 세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TV나 라디오나 갤러리나 음악회에서 전문가들이 만든 음악과 춤과 그림을 감상한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전문가들이 만든 책을 구해 읽듯이 말이다.

전문가들이 축구며 테니스며 수영을 하는 것을 구경만 하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남들이 해석해주는 삶을 그저 동의하거나 취사선택하는 방법으로밖에 삶을 살 수가 없다면, 

우리 현대인은 피상적인 간접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건 삶이 아니고 삶의 이미지이다.

아무리 많은 재화와 물건을 긁어모아도 근본적인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삶을 박탈당한 자의 불만이며, 우리에게 평화가 없고 

충만한 감정이 없는 것은 이미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

남의 흉내를 내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그림이 아니고, 자신의 말로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말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면 이 세상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취미로서도 가장 좋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가정의 벽에 걸어놓는다면 그건 최고의 장식이 된다.

어느 화가의 그림보다도 나으리라.

가정의 아버지의 그림, 어머니의 그림, 아이의 그림이 

걸려있는 집은 화목할 것이며 따뜻한 기운이 감돌 것이 틀림없다.

그 그림이 상징이 되고 표상이 되어 그 집안에 힘을 북돋워 줄 것이다.

왜냐면 그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지이며, 

스탕달이 말했듯이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은 꼭 멀리서 찾을 일은 아니다.

물론 화가의 그림을 사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화가들도 살아갈 수 있고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소수의 재력이 있고 뜻이 있는 사람들이 하면 된다.

감상이 목적이라면, 굳이 그림을 사지 않아도 

전시를 찾아다니며 얼마든지 좋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집안에 그림을 걸어두는 것이 목적이라면, 남의 그림보다는 가장의 그림, 

안주인의 그림, 아이들의 그림이 훨씬 좋다.

누군가의 집에 갔을 때 어디에나 있는 오디오나 TV나 장식장 따위 말고 

그 집 가족들이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집집마다 그 집 가족의 독특한 그림들이 한 점씩, 

두 점씩이라도 걸려 있어서 그 집만의 독특한 삶, 

하나뿐인 소중한 삶을 말하고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아무 곳에나 있는 자동차니 커튼이니 원목 가구니 하는 

하찮은 것들 말고는 보여줄 것도 없는 우리네 가난한 영혼들이, 

이제 자신의 영혼을 보여주고 나누어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이고 삶 속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길이다.

 

 

 

[출처]

www.woochanghe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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