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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디자인을 잘하나?

 

우리 모두의 마음 한쪽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이 순수한 질문은 백이면 백, 확실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무시당한다.

누가 애써 대답해준다면 그건 어쩐지 냉소적인 농담이거나, 

지엽적인 수단이거나, 혹은, 너무 보편적이고 두리뭉실한 관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밤을 많이 새면 돼.", "책을 많이 읽어.", "무조건 열심히 해.", 

"사람들과 잘 어울려.", "잘 된 디자인을 흉내 내.", "감수성을 키워.", 

"말 잘하는 법을 배워.", "체력이 있어야지.", "일단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익혀.", 

"즐겨.", "자료를 수집해.", "사진기를 메고 다녀.", "세상사에 관심을 가져.", "술이나 마셔." 등등.

 

이런 충고들에 배어있는 한결같은 공통점은 말하는 사람도 진심이고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딱 저거다 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그러면, 이렇게 이곳저곳에서 들은 방법들을 한데 모아 제본하면 

그게 "좋은 디자인을 하는 방법 101가지"라는 책이 되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지하게 참고서로 삼을 순 없다.

"부자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 50가지"라는 책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디자인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과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다르다.

그러니까, 인기를 끌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기준으로 좋은 디자인을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심형래 감독의 "디 워"가 명화가 아닌 이유와 같다.

객관적인 지표가 없으므로 내가 정말 디자인을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디자인을 잘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 팀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좋은 디자인을 했다고 여길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디자인 잘하는 거다.

 

좋은 디자인이 뭐냐고? 그 질문이 바로 핵심이다.

디자인을 잘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뭐가 좋은 디자인인가?"에 대해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디자인이 뭔지 네가 한번 한 번 읊어보시지."

 

당신은 지금 마음속으로 이렇게 화내고 있을 수도 있다. 난 모른다. 정말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당신을 모른다."가 더 적당하겠다.

각각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처한 상황이 서로 너무 다르다.

내가 즐겨 쓰는 구체적인 방법이 저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어떤 유명한 디자이너가 어떤 방법으로 즐겁게 일한다고 하길래 

그대로 따라 해 보면 그게 나에게는 정말 고역일 수도 있다.

더구나, 디자이너는 평생 한 가지 거대 프로젝트만 하고 사는 게 아니다.

일이 바뀌면 또 모든 상황이 달라진다.

좋은 디자인은 무엇인지 한마디로 딱 잘라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내가 좋다고 생각한 디자인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쁜 디자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자신만의 고유한 디자인 이론이다.

 

디자이너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수많은 결정을 내린다.

디자인 프로젝트가 굴러가는 과정에는 클라이언트, 

예산, 시간과 재료의 한계 등과 같이 미리 주어진 상황도 있지만, 

디자인 결과에 무엇보다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일을 직접 수행하는 디자이너가 내리는 판단이다.

기획, 아이디어 같은 큰 틀에서부터 스타일, 글꼴, 색깔과 같은 세부사항까지.

디자이너가 이성 혹은 감성에 따라 내리는 수많은 판단이 최종 결과물을 좌우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어떠한 가치 기준에 따라 이런 결정들을 내리는 걸까?

 

자신만의 고유한 디자인 이론에 의지해서 판단한다.

단어에 담긴 딱딱한 느낌 때문에 자칫 이론을 쓸모없는 현학적인 말장난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디자인 이론은 작업과 밀접하게 연관된 실제적인 체계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다 이론을 가지고 있다.

다만 평상시에 이론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이론과 거리가 멀다고 느낄 뿐이다.

디자이너가 세운 고유한 이론은 수없이 다양한 디자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펼쳐 드는 매뉴얼이다.

하지만 이 매뉴얼은 과학적 진실이나 수학적 공식이 아니다.

모든 디자이너에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교과서가 아니다.

야구팀 감독의 작전 노트처럼 각각의 디자이너가 자기만 알아볼 수 있게 휘갈겨 쓴 매뉴얼이다.

 

디자인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그 가치 기준이 변한다.

또한, 애매하기 짝이 없는 시각문화에 관련된 분야인 만큼 

절대적 수치보다는 직관적이고 상대적인 판단이 앞설 수밖에 없다.

디자인은 정확한 공식을 만들어서 정답을 미리 마련해 놓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 누구도 감히 나에게 "이봐, 책의 본문을 조판할 때 글자 크기는 9.5pt, 

행간은 13pt, 칼럼은 10㎝로 세팅해야 한다고. 그걸 몰랐나?"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1925년의 젊은 얀 치홀트가 환생해서 "장식을 넣으면 목을 졸라서 죽여버리겠어."라고 

소리치셔도 난 그 명령을 받들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디자인 과정은 카오스 이론과 닮은 데가 있다.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수억만 가지의 요소들이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녹즙기처럼 갈아뭉개져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어떤 시각적 결과로 나타난다.

이때 녹즙기에서 필터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이론이다.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결정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판단을 의지하는 어떤 개인적인 기준이 있다.

그것이 이론이다. 다른 사람이 만든 디자인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창작자의 주관적 가치를 자세히 알아볼 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디자이너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디자인을 단순히 표면에 드러난 형태와 

기능만 보고 내 생각대로 평가해 버린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억지다.

 

디자인 이론은 내 고유의 것이니까 그냥 내 멋대로 만들면 되나?

그렇지 않다. 왜냐면, 그래픽 디자인은 내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두고 

내 동생한테만 보여주는 예술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든 실무에서든, 디자인을 공부하고 실행하는 전문가라면 

디자인에 대한 가치판단을 나만의 세계에 국한해서는 곤란하다.

디자인은 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결과로 이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판단 기준은 과거와 현재의 문화에 깊게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빨간색을 좋아해."라는 생각과 "빨간색은 혁명을 상징한다."라는 생각의 차이라고 보면 적당하겠다.

내가 단지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디자인을 빨간색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디자이너로서 바른 판단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보는 사람들이 빨간색을 싫어한다면 그땐 어쩔 텐가.

그래픽을 시각언어로 인식하는 디자이너라면 어떤 그래픽 요소를 썼을 때 보는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픽 디자이너의 이론은 사회 문화와 긴밀히 연결돼야 한다.

따라서 디자인 이론은 사회가 거쳐온 역사와, 

동시대 문화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찾기 시작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과거를 알기 위해 역사를 공부한다.

현재를 알기 위해 우리는 사회, 정치, 문화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폭넓게 접한다.

그리고 디자인 세계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지금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읽는다.

 

요즘 사회 문화에 대해서는 누구나 관심이 많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디자인 역사와 이론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많은 디자이너가 일단 반감을 품고 고개를 돌린다.

따분하기 때문이다. 지루하고 재미없다. 공감이 가지 않는다.

억지로 읽어봤자 그따위 것 별로 새롭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다.

마리네티라는 미친 파시스트가 100년 전에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했다는데 

이게 아이폰 시대를 사는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다.

맞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과거의, 그것도 서양 디자이너들의 이론은 

우리가 그대로 따를 수 없는, 그대로 따라서도 안 되는 내용이다.

짧게는 수십 년 전, 길게는 백 년 전에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품었던 생각이 

지금 여기서 현실화될 거라 기대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디자인 이론서는 우리가 외워서 따라 할 수 있는 교과서가 아니다.

다른 디자이너의 이론으로부터 내가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어떤 실질적인 지식을 얻을 거라 기대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이론이나 비평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저자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자세다.

이론으로부터 지식과 해답을 얻는 게 아닌,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활동했고,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의 생각과 태도를 이해하는데 그 의의를 둬야 한다.

그들이 디자이너로서 사회와 문화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고,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론을 읽는 동안 우리는 디자이너답게 생각하는 방법, 

디자이너답게 말하는 방법, 디자이너답게 쓰는 방법, 

디자이너답게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익힐 수 있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를 살펴보라.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이 보일 것이다. 디자이너답게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각문화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생길 것이다. 디자이너답게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디자인 이론서를 사느라 쓴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

 

유명한 디자이너의 이론을 최대한 많이 접하는 것은 좋은 시작이다.

그 후에는 절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론을 통해 얻은 디자이너다운 자세를 바탕으로 폭넓은 관점에서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고,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은 어떤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당신은 자신만의 디자인 이론을 써나가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계속 생각해야 한다.

나만의 이론을 보완하고 교체하면서 가꿔야 한다.

다른 디자이너와 서로 이론을 나누는 과정에서 

계속 쓰고 읽으면서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강한 이론을 키우고 

내가 만드는 디자인을 내 이론에 맞춰 나가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삼 년 전에 쓴 글을 보고 "아, 그때는 정말 부족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은 디자인을 하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다.

 

디자인 이론은 자신을 옭아매는 속박이 아니다.

너무 애매하거나 어려워서 자신을 덫에 거는 꼴이 되면 오히려 역효과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과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은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건 당연하다. 내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디자인을 위해 자신이 세운 이론은 절대 재미없고 딱딱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도 안되며 너무 범위가 좁아서 발상을 제한해서도 안 된다.

 

"나는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은가?"

 

이 단순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자.

그리고 왜 그런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하면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단번에 모든 답을 낼 필요는 없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생각해도 좋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일은 평생토록 이 세 가지 의문에 대답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출처]

www.designerschool.net/readings/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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