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간섭)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지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이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 알력, 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 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 백범일지(나의 소원 中) -
▲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만든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 관한 내용과
광복 후 임시정부 환국(還國)에 관한 내용을 다룬 전시물.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의 환국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시물.
▲ 환국 후 김구 선생의 활동상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시물.
▲ 1948년 4월 19일 남북연석회의(南北連席會議)에 참석하고자
38선을 넘는 김구 선생의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
[남북연석회의(南北連席會議)]
남북연석회의는 1948년 4월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평양에서 개최한 정치회담이다.
해방 후 미국·소련, 남·북, 좌·우의 대립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이 좌절되어가자
중도파 정치인들이 남북지도자 회담을 통한 문제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김구·김규식 등 남측 인사가 남북요인회담을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제안하자
북측에서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역제안하여 남북연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연석회의에서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합의하고 이후
단선단정 반대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실질적 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구 선생의 서거(逝去)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시물.
[김구 암살사건 (金九 暗殺事件)]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한 사건.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특히 김구는 해방 이후 치열한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 우파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47년 말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결국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오랜 시간에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구 선생이 서거 당시 입었던 적삼의 모습.
현재는 백범 김구 혈의(血衣) 일괄 (白凡 金九 血衣 一括)라는 이름으로
조끼적삼(1점), 저고리(1점), 조끼(1점), 개량속고의(1점), 바지(1점),
대님(2점), 양말(2점) 및 개량토시(1점) 등 일괄 8종 10점이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되었다.
백범김구기념관 전시실에는 저고리만 전시되어 있었다.
▲ 김구 선생의 데스마스크의 모습.
▲ 김구 선생의 서거 이후 열린 국민장(國民葬)과 추도식(追悼式)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시물.
▲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
▲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가기 전 찍은 사진.
▲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었던 역사의 길"이라는 이름의 특별전시실 입구의 모습.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에 관련된 전시관이다.
[김신(金信)]
김신(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은 1922년 9월 21일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에서 백범 김구와 최준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연락과
임정요인들 간의 주요 연락 및 정보수집 임무를 맡아서 수행하였다.
1944년 쿤밍의 중국 공군군관학교에 입학해 이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6개월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인도의 라호르로 건너가 초등 비행훈련을 받았다.
해방 후인 1946년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랜돌프 공군기지에 입학하여 비행훈련을 받았고,
1948년 6월, 랜돌프 비행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8월에 난징에 있는 중국 공군군관학교를 졸업했다.
1948년 대한민국 육군항공대에 입대했고 1948년 4월 19일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북으로 향하는 아버지 김구 선생을 수행했다.
이듬해 1949년 10월 1일 창설된 한국 공군의 초대 멤버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한국 공군의 위상을 드높였고,
1960년에 제6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전역 후에는 주 중화민국 대사를 거쳐 제21대 교통부 장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와 백범김구기념관에서는 부자지간의 정을 나눌 시간 없이
늘 그리워 했던 아버지 백범 김구와 아들 김신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
"자식들에 대해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란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백범일지에 담긴 백범 선생의 고백처럼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수많은 애국지사분들은 자신의 가족, 자녀들을을 돌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마저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여기 아버지 백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와
그의 아들 김신의 자서전 "조국의 하늘을 날다"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었던 역사의 시간과 무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 특별전시관 소개문 -
▲ 특별전시관에서는 김신의 전반적인 생애를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며
대한민국 근현대사도 조금이나마 확인해 볼 수 있었다.
▲ 백범김구기념관 2층에는 크로마키가 설치된,
백범 김구 선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1인 1매만 가능하며 10시~17시까지 운영한다.
▲ 모든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기 전 찍은 사진.
▲ 백범김구기념관을 나온 후 찍은 마지막 사진들.
이상으로 백범김구기념관 방문 편을 마칩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