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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려대는 전화를 받지도 못하고, 꺼버리지도 못하고, 

그림은 그리면서 앉아있는데 바늘방석이다.

 

 

 

[제발... 그림 좀 그리자아~]

 

소심한 P는 전화 꺼버리면 일부러 안 받는 게 너무 티 날까 

마치 전화 소리를 못 들어서 못 받는 양 그냥 전화를 울리게 둔다.

지금쯤 P의 담당 디자이너 Y는 기절 직전이겠지?

또 전화 받으면 일정 다 까먹고 그림 넘기면 디자이너는 언제 디자인하냐, 

인쇄 일정 어기면 얼마가 날아가는지 아느냐, 속 풀릴 때까지 짜증 내겠지.

그런데 그림 그리는 와중에 딱히 약속 시각까지 그림 다 못 그린 이유를 생각해내기가 쉽지 않다.

 

아파서...는 이미 두 번이나 약속 시각 어기면서 써먹었고...

아까 잠깐 급수차에 물 길으러 갔었는데 그걸 핑계 댈까?

 

 

 

[전화를 받자!]

 

동네 수도가 단수돼서 물 길으러 가느라 다 못 그렸어요, 하루만 더 주세요, 

최대한 불쌍하고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안 봐도 기막혀서 말을 잇지 못하는 Y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또 도와준다면서 집으로 쳐들어와 지키고 서서 아무 일도 못 하고 

그림만 그리게 하여 기어이 그림 받아 가겠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일러스트레이터 P는 오늘도 밤샘이다. 손이 느린 P는 언제나 주어진 일정이 빡빡하다.

한 장이라도 자신의 작품으로 후회 없게 그리고 싶은데 

그러다 보니 1년에 동화책 두세 권 그릴 수 있으면 다행이다.

거기다 친분을 내세운 디자이너들이나 편집자들이 

급하게 그림을 부탁하면 거절할 수가 없어 무리해서 

일을 받아와 밤새워 후회하며 그림을 그린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십여 년 그림을 그려오면서 

나름대로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인정받고 선생님 소리 듣고 있지만 

그림을 그릴 때면 언제나 시간에 쫓긴다.

사실 그렇게 시간을 조금 준 것도 아니다.

주간지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레이션을 주로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은 그림 한두 장 정도는 하루 만에 그린다.

주간지의 제작 일정상 글 나오고 그림 그려서 책 만드는데 고작 3일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으므로.

P는 그래도 만족할 수 있는 정도의 완성도가 나오지 않으면 절대 그림을 넘길 수 없다.

마감 시간 못 지키면 전화로 고문당해가며 이러고 살아야 하나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최후까지 그림을 붙들고 맘에 들 때까지 그려서 보낸다.

그런데 그 그림을 받아보고는 그때까지 원수 대하듯 하던 

디자이너나 편집자들이 그림이 좋으니 모든 게 용서된다.

감탄 연발하며 좋아하는 걸 볼 때면 일러스트레이터로 사는 게 더없이 행복하다!

 

P는 미술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거나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일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천직으로 생각하고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미술대학 입시에서 떨어지는 순간 화가로서의 꿈을 접었다.

대학 입시도 떨어지는 정도의 재능으로 무슨 화가가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냥 인문대에 진학, 그렇게 그림의 꿈을 접었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고, 

어쨌든 먹고살아야 하니 일러스트레이터로의 길을 걷기로 했다.

먼저 옛날에 화실 같이 다니던 친구 중 졸업 후 출판사에 취직해서 

편집 디자이너로 일하는 친구에게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 그림을 그리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최초로 받은 일이 어린이 정보 그림책에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와 

닭으로 자라는 과정을 보여주는 페이지의 장식 컷으로, 

둥지 느낌을 주기 위해 지푸라기로 테두리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래 봐야 2만 원짜리 그림이었지만 감격하며 달려가 일을 받아 왔고 

지푸라기 뭉치 느낌을 대충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세밀화를 그리듯이 

지푸라기 하나하나를 그려서 전체 테두리를 만들었다.

일을 준 친구는 그 화료에 그렇게까지 열심히 그려 온 그림을 보고 놀라면서 미안해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더 비중 있는 컷들을 그리게 되었고 그렇게 일여 년 

열심히 그리다 보니 드디어 혼자 온전히 그림책 한 권을 그릴 기회가 왔다!

 

그러나 그림책 한 권을 그린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그림책이라는 것이 아이들이 보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 책에서 주고자 하는 내용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전달해야 하므로 

책 본연의 존재 이유와 책의 역할 등 아주 기본적인 책이라는 

본질에 관해 공부해야 했고 어린이 교육에 관한 공부도 해야 했다.

24페이지 그림책을 밑그림 포함해 페이지당 최소 10번씩은 그렸다.

그렇게 혹독하게 그림책 한 권을 맨날 울면서 6개월 만에 

완성한 이후 일러스트레이터로 살 자신이 없어져서 도망치듯 여행을 갔었다.

그러나 그림책 그리기는 P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화가로 사는 삶 

이상으로 멋진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천직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재정적인 부분에서 심하게 감이 없는 P는 일이 많을 때는 

수입이 많다가 한 달 내내 일이 전혀 없을 때도 있는데 그런 때는 또 알거지다.

그럴 땐 출판사 찾아다니며 일 달라 영업도 좀 해야 하는데 그도 P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있는 대로, 그때그때 돈이 생기는 대로 두서없이 쓰다 보니 생활이 들쭉날쭉하다.

지름신이 맨날 강림하는, 충동구매의 화신인 P는 뭔가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에이, 그림 한 장 더 그리면 되지, 하며 사 버리기 일쑤.

참 대책 안 서는, 전형적인 현실감각 부재의 예술가 스타일이다.

 

같은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인 선배에게 들은 얘기로는 

월급쟁이보다 프리랜서는 3배를 벌어야 같은 수입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회사에서의 4대 보험 같은 혜택부터 각종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보장과 월 고정 수입이라는 측면 등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프리랜서는 겉으로 보기엔 더 수입이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직은 젊지만, 앞으로 계속 일러스트레이터 프리랜서로 살아갈 P는 노후 대책, 

뭐 이런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온다.

 

 

 

[프리랜서, 저축이 필요하다]

 

그리고 회사에 출퇴근하며 하는 일이 아니라서 시간 관리가 안 된다.

원래도 마감에 쫓기면 밤이고 낮이고 일을 해야 하고 

일없으면 종일 잠만 자도 되니 일이 있어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딴짓하다가 시간 다 보내고 

날이 저물어오면 괜히 마음 급해져서 그림 붙들고 밤새우고...

참 자유롭게 보이지만, 자유로운 게 사실이지만, 무계획한 자유란 늘 불안감을 동반한다.

 

일러스트레이터 중 일정한 시간에 작업실에 출퇴근하면서 

일한다는 사람 있지만, P는 그게 잘 안된다.

회사처럼 강제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효율적인 시간 활용을 위해서는 각고의 자제력이 필요하다.

 

 

 

[프리랜서, 극기심이 필요하다]

 

요즘엔 해외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그림을 의뢰하는 출판사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 방법이 비용이 덜 든다는 얘기도 있다.

뼈를 깎는 산고를 겪으며 한 장 한 장 그림을 그리는 

P에게 화료가 해외 일러스트레이터 보다 비싸다 얘기하는 

편집자들을 만날 때면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쨌든 경쟁 사회이니 시간 관리 잘해서 더 빨리, 더 많이, 

더 작품성 있는 그림을 그려서 경쟁력을 가져야겠다 생각한다.

 

조직에 잘 적응하기 힘든 예술가적 성격을 조금씩은 다 가지고 있고 

자신의 재능으로 혼자서 먹고살 수도 있는 디자이너들.

여차하면 에잇, 때려치우고 프리랜서나 해야지,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프리랜서로서 자신의 크리에이티브를 성취하고 경제적으로도 

불편 없이 살려면 월급쟁이보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선택해야 한다.

자신이 과연 스스로 돈과 시간을 잘 관리하고 영업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판단해 봐야 한다.

 

P는 언젠가는 자신이 기획하고 글을 써서 그림도 그린 그림책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럼 그걸 출판해 줄 출판사가 있겠지? 그냥 회사를 하나 차릴까?

계획을 세우기 힘들고 모든 면에서 안정적이지 않은 

프리랜서 하지 말고 차라리 회사를 만들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다 하면...

사장은 직원들 시켜도 되고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글 | 신지희(CDRON 대표)

 

 

[출처]

www.sangsangmad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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