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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은 없지만, 작가 활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이야기므로, 

출중한 재능을 지닌 이, 혹은 훌륭한 작업을 몇 점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이라면 읽을 필요가 전혀 없겠다.

 

어느 예술계를 보나, 딱히 적이 없는 특이한 위상의 예술가가 있다.(나는 그들을 깍두기라고 부른다.)

그렇게 특별한 매력을 지닌 미술가와 사적으로 어울리기 시작하면, 

미술계에 입문하는 데 큰 이득이 된다.

어쩌다 한두 번 전시 기회를 얻었을 때, 담당 큐레이터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전시 오프닝 뒤풀이에서 그가 잘 아는 분야에 관해 

질문하고 진심으로 경청하는 자세를 연기하라.

(사전에 그의 졸업 논문 주제가 무엇인지 검색해보라.)

그는 반드시 당신을 다른 기회에 추천한다.

 

누군가의 추천을 받은 경우, 어느 정도 제 몫을 해내는 것이, 

즉 추천자의 체면을 지켜주는 게 몹시 중요하다.

추천자의 얼굴에 먹칠을 하면, 그는 다음 추천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당신은 저주의 대상으로 전락할 테다.

 

어렵사리 전시를 치렀더라도, 작업이 출중하다면 모를까 웬만해선 전시 리뷰를 받기 어렵다.

사전에 갤러리나 큐레이터를 통해서 원하는 미술지에 지면을 약속받고, 

적당한 평론가를 찾아 갤러리스트(속칭 "갤러리나")나 큐레이터를 통해서 평을 청해야 한다.

이때 평론가 가운데 작품 잘 보기로 이름난 이는 피한다.

어차피 그는 당신에게 좋은 글을 써줄 리 없다.

명망은 높지만, 작품 보는 눈이 없는 샌님 같은 모범생형 비평가가 최적이다.

 

그를 만나게 될 때, 미리 그의 대표 저술 한둘을 읽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호감을 표하라.

그러면 그는 당신을 "공부하는 좋은 작가"라고 착각하고, 

무난한 평문으로 당신의 작업이나 전시를 칭찬하게 마련이다.

평론가 앞에서는 언제나 말을 아껴야 한다.

B급 비평가의 언어 감수성도 당신의 그것보다는 잘 발달해있다.

기술적 발화를 일삼다가 영혼의 밑바닥을 내보여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인쇄 문자로 된통 난도질을 당하는 수가 있다.

 

억지로 평론가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일은 피하는 게 좋다.

전시 서문 청탁조차 경륜 있는 갤러리스트나 큐레이터를 통하는 편이 안전하다.

 

유명 국제 미술지를 구독해 유행하는 담론을 파악하고, 

그를 국내에 수입한 이론가는 누구고, 그를 잘 활용하는 큐레이터는 누군지 조사하라.

작업을 그에 맞춰서 하거나, 작가 스테이트먼트에 관련 키워드를 삽입하면, 

그 이론가나 큐레이터가 1~2년 안에 당신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식으로 치졸하게 작업하는 유명 작가는 의외로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사교적인 자리에서 만난 큐레이터가 

특정 주제로 전시를 기획하고 있노라고 말하면, 

"나도 그런 주제로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는데!"라고 뻔뻔하게 맞장구를 쳐야 옳다.

이때 이름 떨구기를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관련 이론가와 작가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어야겠다.

 

기획전에 초청된 경우엔, 전시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결코 티를 내면 안 된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 설치 공간과 작품 제작비가 얼마나 제공되는지만 신경 쓰면 된다.

막판에 작품 설치를 거부한다든지 하는 자아 과시는 A급 작가의 전유물이다.

B급 주제에 A급 작가 연기에 도전했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물론 성공한다면, 경축할 일.

 

A급 작가 연기에 도전하고 싶은 B급 작가라면, 죄책감 과시에 능해야 한다.

헤게몬 쿨루스(헤게모니와 호문쿨루스의 합성어, 신자유주의, 

가부장주의, 이성애주의, 대량소비 등이 좋은 예다.)를 지목하고 

그에 영웅적으로 맞서 싸우는 척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몸에 익혀야 한다. 사회, 정치적 이슈 따위로 죄책감 과시를 일삼을 때 주의 사항은, 

원칙론 외의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된다는 점이다. 진심 따위는 개나 줘라.

 

자본주의를 싸잡아 비판할 때 예술가에겐 절대적 자유가 

허용된 것처럼 말하고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의 허세에 도취하여 진짜로 금기의 벽을 넘어서지 않도록 유의할 것.

죄책감 과시와 함께 엄청난 겸손을 연기하는 것도, 대가인 척하는 데 꽤 효과적이다.

과잉 겸손은, 수동적 공격성의 태도로 무장하고 보호막을 둘러치는 최선의 술책 가운데 하나다.

타자(유색인종, 이주노동자, 성적 소수자 등)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거나, 

타자성의 화신을 자처하는 것도 소위 "까방권(까임 방지 권리)"을 획득하는 손쉬운 방법이다.

 

사적인 자리에서라면, B급 작가는 정치적 큐레이터와 이론가에게 

아예 어떤 작업을 해야 좋을까를 대놓고 물어도 좋다.

한데 그가 말로만 듣던 A급인 경우, 그런 질문을 던졌다간 

다시 대화하기 어려울지 모르므로, 상대의 수준 파악에 유의한다.

해외 유명 큐레이터를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다면, 

남들 앞에서 그를 언급할 때 무조건 "퍼스트 네임"으로 부른다.

만난 적이 없어도 만난 척할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하라.

변방의 삼류 예술인들은 유력한 큐레이터나 

평론가를 격의 없이 호명하는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어설픈 유학파일수록 그런 증세는 더 심하다.

 

아부엔 장사 없다. 아부라는 걸 알고도 약해지는 게 인간이다.

사회적 인정에 목마른 중년 이하의 큐레이터라면 예외 없다.

(반면, 사르캐즘이나 메타한 농담은, 서구에선 통하지만, 한국에선 금물이다.)

하지만 작업실을 찾은 큐레이터, 평론가, 수집가, 화상에겐 굽실거리면 안 된다.

내 홈그라운드에서 주도권을 잃으면 바보로 뵈기 때문이다. 지나친 접대는 부작용을 부른다.

맛있는 고급 차와 과자 정도를 내놓는 건 무방하다. 첫 방문에서 작업 전부를 보여주는 것도 금물.

 

작가 사회에서 평판을 유지하려면, 일단 그들의 전시 개막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솔직한 비평이나 신랄한 농담은 금물이다.

사전에 얼마나 오래 머물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후배 작가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오프닝에 앙트라지를 이끌고 나타나는 일은 필수다.

듣는 이가 감동할 만한 덕담을 던지는 매너도 중요하다.

하지만 오프닝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경우, 티 나지 않게 재빨리 피신하는 요령도 필요하다.

어떤 경우라도, 진지한 표정으로 작품을 꼼꼼히 뜯어보는 척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견딜 수 없는 비디오 작품이라면 천식 환자처럼 심하게 콜록거리면서 자리를 뜨면 된다.

새로 꾸민 비디오 방은 언제나 독한 페인트 냄새로 가득하기에, 이는 얼마든지 핑곗거리로 통한다.

 

동료 작가들에게 환심을 사려 거든 작품 철수 마지막 날 불쑥 나타나 일손을 거들라.

마지막 날 감정적으로 괴롭지 않은 작가는 없다.

상자 몇 개 옮긴 뒤 그의 신세 한탄을 들어주기만 해도 

그는 당신을 훌륭한 동지, 진정한 예술가라고 착각할 테다.

하지만 조언을 해주되 약점은 입에 담지 마라.

어차피 그의 작업이 좋아져 봐야 당신 손해다. 그의 작업에 관해 질문하고, 이야기를 들어줘라.

그는 앞으로 전시 기회를 당신과 함께 나눌 것이다.

 

작가 사회에서 어느 정도 평판을 얻으면, 일단은 생존의 바탕이 마련된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공짜로 머슴 일을 시켜 먹으려는 

이들의 마수를 교묘히 피해 가면서도 미움을 사지 않는 일이다.

한번 유력한 이의 작업 조수로 봉사하기 시작하면, 남들은 모두 당신을 행랑아범 보듯 할 것이다.

한 번 정해진 서열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어쩌다 동료 작가가 요절했다면, 그의 주요 작품 서너 점을 사버려라.

그의 예술이 재평가받을 때 당신은 그 작품들을 인질 삼아 교묘히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최상은, A급 작가의 배우자가 된 후, 그를 먼저 저세상으로 앞세우는 경우다.

작고한 유력 예술가의 배우자로서 작품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보다 더 당신의 정치력을 상승시키는 일도 드물다.

 

다른 작가의 작업을 그대로 표절하는 경우, 

내용이나 맥락을 그대로 따르되 시각적 외형은 베끼지 않도록 한다.

자고로 표절은 입증하기 어려운 범죄다.

대놓고 표절한다손 쳐도 그걸 문제 삼을 만큼 한가한 A급 평론가는 없다.

법정으로 갈 확률은 더욱 희박하다.

표절의 대상이 된 작가를 마주치면, 밝고 가볍게 인사하면서 예의를 갖춰라.

(당신이 움찔하는 순간, 표절 당한 쪽은 그간 품었던 의혹을 확신하게 된다.)

그가 A급 작가라면, 그는 거꾸로 감사를 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불같이 화를 내거나 공개적으로 표절을 문제 삼고 나섰다면 그도 당신과 같은 삼류 작가일 게다.

이 경우 잃을 것은 없다. 덤덤하게 표절 의혹 제기를 무시하고, 누가 이에 관해 물으면, 

오히려 표절을 당했노라 너털웃음을 웃으며 점잖게 답하라.

삼류 작가끼리의 이전투구에 참여하는 이는 바보뿐이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테다.

 

언제나 작가처럼 입어라. 남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도 통한다.

어차피 예술계는 몹시 파편화돼 있기에, 

노골적으로 타인의 드레스코드를 베껴도 알아차리는 사람은 극소수다.

한편, 오프닝 당일엔 헌 옷을 입어야 한다.

돈 좀 벌었다고 입는 옷의 브랜드를 상향 조절해도 곤란하다.

돈이 벌리거들랑 은행에 넣어두고 잔고를 확인하며 홀로 낄낄낄 웃어대라.

오프닝 파티와 뒤풀이는 일터다.

한데 오프닝 파티에서 테이블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면, "창녀" 취급을 받는다.

적절히 흐름에 쓸려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권력자들은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경향이 짙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엘리베이터에서 당신과 단둘이 남았는데 

난데없이 말을 걸었다면, 평판이 상승했다는 뜻이다.

이때 바보같이 감동하면 곤란하다. 자연스럽게 적절히 답을 해야, 

앞으로 마주치면 "세이, 헬로"하는 사이로 지낼 수 있다.

 

화상과 작가의 관계는 악덕 기업가와 후첩의 그것과 유사하다.

달려들어 애정을 갈구하면 멀어진다.

결정적인 순간에만 매력을 발산하고 평소에 냉담해서 

언제든 짐을 챙겨 떠날 준비가 된 인상을 풍겨야 유리하다.

작가가 화상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엔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미안한 표정을 드러내는 찰나, 장사꾼인 화상은 반격의 고삐를 틀어쥔다.

수집가 가운데 제 컬렉션에 진짜로 확신을 품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

특히 그가 당신의 작품을 샀다면 그에게 감식안이란 게 있을 턱이 없겠고, 

수집가의 수집품을 사적으로 구경할 기회가 생겼다면, 

말을 아끼다가 탁월한 작품을 만나면 칭찬을 하고, 

태작을 보면 낮게 탄식하며 "어, 이건 쓰레기로군."이라고 뇌까려라.

 

그는 흔들릴 것이다. 충분히 흔들리는 경우 당신은 그의 수집 과정에 

조언을 건네는 특별한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기업을 운영하는 수집가는 대개 정치인에게 약한 법이다.

정치인 한둘과 안면을 트고, 기업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절친한 태도로 호명하면, 

기업인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 달라진다.

 

약력을 길게 늘여 적는 일은 사기꾼에게도 금물이다.

아트 페어 참가는 사기 이력에도 도움이 안 되니, 적어 넣을 생각도 하지 말 것.

그리고 데뷔 전시가 아니라면 출생연도를 밝히지 마라.

그걸 알아내는 일은 이력을 검토하는 이의 몫이다.

 

이상의 규칙을 실천하는 순간, 당신은 성공적 작가-사회-생활을 수행하는 인간쓰레기로 전락한다.

머리를 굴려서 진정한 대가가 되는 일은 없으니, 설사 가짜 성공을 구가하는 순간이라 해도, 

나 자신까지 속여 넘기는 슬픈 실수는 저지르지 말길.

 

(추신: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동료가 좌절할 때, 친구를 가장해 그의 곁에 머물라.

남의 불행처럼 기쁜 일이 또 있는가?)

 

 

 

[출처]

blog.naver.com/vpaula/10018391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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