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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여타의 다른 일처럼 기본기를 성실히 익히면 된다.

 

그림의 기본기는 운동선수가 기초체력을 다지는 일이나 

패션모델이 몸매를 만들기 위해 다이어트와 운동을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통 수준의 인식능력과 성실과 노력이 있다면 

타고난 재능을 탓하지 않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의 기본기를 익혔다고 곧바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루한 습작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과나 꽃 따위의 정물을 그리고, 나무나 들판, 산이 있는 풍경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그린다고 작품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연습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보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들에게 자랑은 할 수 있어도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그림의 기본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은 조형적 언어이다.

이 조형적 언어는 물감과 붓 따위의 재료를 다루는 

기술과 형태, 명암, 구도, 색채, 질감 따위를 말한다.

대부분의 입문자는 이 습작 단계를 작품 창작 단계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이것도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뭐, 할 수 없는 일이다.

 

 

 

 

 

앞 얘기는 이 정도에서 그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화가가 전시를 하는 목적이 뭘까?

당연히 자신의 작품을 사회화시켜 존재가치를 높이고 다 넓고 깊은 소통을 하기 위해서이다.

쉽게 말하면 대중과 미술계로부터 자신의 능력과 작품세계를 인정받기 위함이다.

더 궁극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미술작품을 사회적 가치로 환원시켜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얻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말은 원론적이다. 씨앗을 심은 것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씨앗을 뿌렸다고 저절로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동화에서는 모든 공주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모든 공주가 아름답지도 않고 

왕자가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지 않으며 

그들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꿈을 꾸는 것과 그것을 구현하는 문제는 전혀 다르다.

씨앗을 뿌리고 영양분을 공급하고 병충해를 막고, 

가지치기를 하면서 제대로 자라게 하는 과정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습작이나 연습 작품을 전시해 놓고 좋은 가치를 얻고자 하는 것은 무리이고 시기상조이다.

화가가 작품을 가지고 사회와 관계를 맺을 때는 작품이 완성되어야 한다.

작품이 완성된다는 의미는 하나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작품세계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 보편성과 객관성을 누가 만들어 주는가?

 

그림에 입문한 초급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려야 할지 잘 모른다.

어떤 주제와 소재를 선택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기법을 구사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또한,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리고 있는지, 방향은 맞는지도 잘 모른다.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초급자가 괜히 초급자이겠는가.

주제나 소재에 대해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도 있고, 

작품의 방향이나 흐름을 주변 사람들, 선생이나 동료에게 힌트를 얻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똑같은 선생 밑에서 똑같은 지식을 얻었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응용하여 구현하는 일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예술작품은 사회 속에서 수용되고 소통된다.

무인도에서 완벽한 작품을 창작해도 소용이 없다.

그 완벽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제멋에 화려한 옷을 입고 노는 여성은 약간 맛이 간 사람이다.

여성의 화장과 패션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와 사람들에게 확신과 인정을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빠른 길이다.

작가가 전시활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가끔 단체전을 하는 것을 보면 한 작가당 

한두 점 정도의 작품을 출품해 전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전시는 목적이 의심스럽다.

한두 점의 작품으로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전혀 알 수가 없을뿐더러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런 방식의 단체전을 하는 목적은 사회적 발언을 위한 주제전이거나 

혹은 미술집단의 규모와 위세를 떨치기 위함이나 

현시대 작품 경향을 알기 위한 기획전 정도가 대부분이다.

 

사회적 발언과 시각 환기를 위한 전시는 

최대한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참여 작가도 많아야 한다.

이럴 때 작품은 높은 완성도나 수준을 가질 필요는 없다.

기획의도에 맞고 시각적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원한다.

이 전시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과 위치를 확인하는 성과를 얻는다.

미술 운동 차원에서 특별한 사조와 이념으로 무장한 그룹이 

기존의 미술계에 반발해 집단으로 미술 활동을 펼치는 단체전의 경우... 요즘은 없다. 넘어가자.

 

이것이 아니라면 동문회나 친목회, 취미 작가 모임 따위가 

조직의 규모나 위세를 떨쳐보려는 전시도 있는데, 작품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조직이 목적이고 작가는 그 조직의 조직원임을 확인하고 확인받는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 박물관, 시립, 공립 따위의 공공미술 공간에서 

현대 미술이나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흐름을 정리하고 

경향을 알아보고자 여는 기획전이 있다.

혹은 지역 미술관서 지역민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근 경향의 작품이나 특정 사조, 유파 따위를 정리해 전시하는 때도 있다.

이 전시의 목적은 공공성에 있다. 이 흐름에 작품이 선정된다면 영광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작품세계가 완성된 작가를 선발한다.

 

이것 말고도 개인 화랑이나 기업이 운영하는 화랑 따위에서 여는 단체전이 있다.

대부분은 작품 판매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약간의 공공성을 띠는 일도 있지만 

이것도 화랑이나 미술관 운영과 홍보 따위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끔은 단기적인 행사나 이벤트 따위를 홍보하거나 구색을 갖추기 위해 

단체전을 기획하기도 하는 데 당연히 목적은 명쾌하다.

작품성이나 작품의 소통, 혹은 작가의 작품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작품세계가 완성된 작가의 경우는 다양한 형태의 

전시회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작품세계를 완성해 가고자 하는 신진작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전에 참여할 수도 설사 참여한다고 해도 얻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형식의 외피를 쓴 단체전이 난무하는 것은 

작가에게 경력을 팔아 장사를 하기 위함이다.

작가는 한두 점의 작품으로 그럴듯한 경력을 얻을 수 있으며, 

전시를 기획하는 자는 자신의 기획능력과 

경험을 쌓으며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이득이 있다.

 

 

 

 

 

작가의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관심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이것이 전시회를 통해 대중과 미술현장에서 인정받아 가면서 

서서히 객관성을 획득하며 완성되어 간다.

전시는 단체전이든 개인전이든 대중과 미술 현장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내어 보이는 자리이다.

전시 경력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전시 경력에 집착하는 것은 미술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폼을 잡기 위한 행위이다.

겁을 주고 위세를 보여 그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 미술현장-미술계, 혹은 업계의 동료, 미술현장이 곧 화단이다.

미술협회, 미술대학, 화랑 따위는 화단을 이루는 일부의 요소이다.

수십 개의 미술협회와 그만큼의 미술대학과 수백 개의 화랑과 

수백 명의 평론가와 수천 개의 미술 학원과 수천 명의 미술학도와 

수만 명의 화가와 또 그만큼의 취미 화가와 전시장과 

미술 관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단체전을 하는 이유는 비교적 부담을 줄인 시연회나 시사회, 혹은 시음회 같은 것이다.

일종의 테스트를 받는 일이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작품을 출품해야 한다.

한두 점의 작품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단체전을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자신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요구와 대중의 요구, 혹은 미술현장의 요구를 가늠하고 조정할 수 있다.

 

개인전은 이것보다 적극적인 행동이다.

수십 점의 작품을 대중과 미술현장에 드러내 보이면 

작품의 앞뒤를 가늠할 수 있는 흐름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장점을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수십 번의 이런 단체전과 최소한 3번 이상의 개인전을 통해 작가와 작품은 완성되어 간다.

 

작품세계가 완성되어야 사회와 소통할 수 있다.

마치 제품을 불량 없이 완성해야 유통하고 판매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위생적이고 맛있는 음식을 완성해야 손님에게 내놓는 일과 같다.

 

화려한 전시 경력에 속지 마라. 한두 점 달랑 출품하는 전시를 하지 마라.

단체전보다는 개인전을 많이 해라. 경력으로 대중 위에 군림하거나 폼을 잡지 마라.

화가는 겸손한 사람이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전시는 자신을 온전히, 발가벗고 드러내는 자리이다.

그 이후에 대중의 판단과 미술현장의 소리를 겸손하게 들어라.

내가 뭘 그려야 하는지, 내가 뭘 잘하는지 가르쳐준다.

나에게 창조적 영감을 준다. 나의 존재를 높이고 사랑받게 하는 곳이다.

대중과 미술현장은 나를 먹이고 키우는 부모와 같은 존재이다.

 

 

 

[출처]

misulb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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