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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무엇인가?

 

자유를 말하고 억압을 부정하는 행동, 사람과 동물을 관찰하는 작업, 

가르침과 깨우침으로 참된 일상을 찾아가는 여정, 

정해진 공간에서 분할된 시간을 현명하게 채득하는 과정, 

자연의 향기를 배우며 새로운 시각을 기록하고 담아내는 일, 

음악을 통해 영감을 얻어가는 활동, 작품의 구도와 짜임새를 찾아가는 열정, 

실의를 통해 성숙함으로 위안을 얻으며 전진하는 자세, 

체념하고 또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마음가짐, 

인생을 계획하려는 의지와 노력, 종교를 통해 얻는 믿음과 평안함, 

공동체와의 생활과 그에 따른 지혜, 성에 눈을 뜨는 시기, 

가족과 더불어 작은 결실에 만족의 미소를 띠는 행위, 

고독할 때 자연을 느끼는 여유 등을 예술이라고 말할까.

 

다음 스케줄을 기다리는 동안 우연히 집어 든 

"그림 읽어주는 여자"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 화가의 영혼과 인생에 대한 그만의 힘을 느끼는 일이다."

 

화가는 자신의 인생, 객관적인 시간과 외부로부터 폐쇄된 

한 개인의 공간을 작품 속에 반영하지는 않는가.

 

동심을 불러 이르키는 장 미쉘 바스키야의 [이태리어로]

 

예술 속 예술이 예술을 말하는 에드가 드가의 [리허설]

 

몇 줌의 재들과 뒤섞인 미묘한 도형들의 집합체인 

아실 고르끼의 큐비즘 [까맣게 타버린 연인]

 

모두가 소유하고 싶은 명작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공상과학을 연상케 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산맥 위의 성]

 

풍부한 색감과 비현실적인 구도의 복합체인 호안 미로의 [어릿광대의 축제]

 

표정만으로도 그 처절함이 전해지는 에드바르 뭉크의 애절한 [절규]

 

평면의 시각과 개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파블로 피카소의 [세 명의 악사]

 

인생은 돌고 도는 수레바퀴라며 은연중 설명해오는 박순철의 [부전자전]

 

아직도 현존한다는 백록 다방을 떠올리게 하는 이중섭 화가의 [달과 까마귀]

 

콜라의 달콤함을 시각적인 면에서 자극해오는 앤디 워홀의 [푸른 코카콜라 병]

 

추상적인 상징들의 나들이 속 감춰진 살바도르 달리의 [나르시시즘의 변형]

 

어쩌면 예술은 우리에게 엄숙하고 엄격하기보다는 가깝고 친밀한 매체인 게 분명하다.

우리는 대중을 통해 이미 검증된 "문화", 즉 "고전"을 예술이라고 일컫는다.

대중이 호흡하는 "문화"란 한마디로 인간의 축적된 삶의 또 다른 모습이 분명하다.

누군가에 의해 승화된 한편의 삶이 음악, 미술, 문학, 연극, 영화, 무용, 

조각, 건축, 영화 등 심미적인 유, 무형물로 변형되는 과정과 그 결정체가 바로 예술인 것이다.

 

"지식의 미술관"의 저자 이주헌 씨의 설명처럼 

예술 속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이 모두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인간도 있고 자연도 있고 심지어 초 현실의 세계도 있다.

역사적인 사건도 있고 개인적인 사건도 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 평화와 갈등이 다 들어 있다."

 

예술은 "평범한" 인생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혼"이 담겨있다.

예술의 진화와 인간의 발전은 서로와 어떤 역학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걸까.

미미의 차가운 손을 덥석 잡던 로돌포를 그린 푸치니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적은 셰익스피어, 

병사에 이야기를 남긴 신고전주의의 대가 스트라빈스키.

모두 주위에 비친 흔한 일상들을 표현했을 뿐이다. 인상파들은 왜 일본 판화에 빠졌을까.

 

프리다 칼로는 왜 자신의 탄생, 불행, 행복, 열정, 고통, 인내, 사랑, 

그리고 인생을 그렸을까. 피카소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고, 

프리다는 경험한 고통을 색다른 언어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레마르크, 제니 홀저, 백남준, 앤디 워홀, 괴테, 쉴러, 위고, 

디킨스, 베토벤, 쇼팽, 차이콥스키,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들의 작품들을 통해 무엇을 추구했나.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그린 동기는 무엇인가.

혹시 예술은 타인과 소통하는 기구는 아닐까.

 

"나는 찾지 않는다. 다만 발견할 뿐이다."

- 피카소 -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어릴 때부터 생명을 바쳐가면서까지, 

곧 무용가는 다리를 빨리 춤추게 하는 일을, 

음악가는 민첩하게 음표나 현악기에 익숙해질 것을, 

화가는 그가 본 것을 다시 그리는 일을, 

시인이나 소설가는 온갖 이야기를 작문으로써 

만드는 일에 일찍 희생하면서 연습하는 것이다.

반라의 여자가 육감적으로 신체를 불태우며 도발적으로 

움직이는 무용은 단순히 음탕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행위를 보면 그야말로 당황하게 된다.

그런데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침을 흘리기도 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전에도 지적했듯이 문화란 오락성과 교양은 물론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겸비해야 한다고 본다.

예술은 유희적인 욕구만을 채워주는 도구가 될 수 없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기계적인 기교와 자극적인 관능에 치우쳐 오관에만 기준을 둘 때 

"관객"은 탐미주의에 빠지는 실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엔 가난한 시인도 없고, 배고픈 화가도 없으며, 

발이 꽁꽁 얼어버린 발레리나가 설 자리도 없다.

 

대중(Masse)이 즐기는 예술은 시대와 장소, 

그 당시 대중의 지향과 취향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아왔다.

종종 예술은 사회의 이념과 사상을 흡수하며 이데올로기의 대변인 역할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예술은 다양한 연령층 및 사회의 시각대 역할을 완수했으며,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그 목적에 따라 객관적이기도, 

탄압받기도, 만인의 추앙을 받아오기도 했다.

 

"인간적인 사랑을 배반하는 예술은 명료하게 해석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추종자에 의하여 모순과 당착하는 해석을 일삼는다."

 

기계 A가 그린 그림은 인간보다 정밀하고 정확하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 A가 그린 그림을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훗날 만들어진 기계 B가 과거 기계 A보다 더욱 정밀한 작업을 구연한다 해도 

우리는 분명 그 그림을 예술이라고 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기계는 숙련된 기술을 구사하기는 하나 마에스트로처럼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사진계의 전설인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처럼 기막힌 순간을 포착해 

사회에 이슈를 전달하는 행위는 인간만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가!

예술이란 온갖 형식의 건축, 조각, 회화, 음악, 시이다."

 

미적인 최상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행위가 과연 필연적인 예술에 속하는가.

"현대 미학의 문제들"에서 르낭은 촉감, 미감, 

후감, 시감, 청감 모두가 미학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촉감, 미감, 후감을 통해 전해진 쾌감은 대중이 공유하기 힘듦으로 

예술로 분리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현존한다.

 

시감과 청감 역시 지역에 따라 "미의 기준"과 개념이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므로 

예술로 분류하기에 앞서 무척 까다로운 기준이 세워질 수밖에 없다.

시인에게 아름다운 계절의 풍요로움이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는 사실과도 비교될 수 있겠다.

그런 객관성 때문에 관찰자의 정신이 주관적인 교육을 거쳐야 한다는 전제가 발생한다.

베론의 미학서는 사람들이 예술을 "순수한 공상과 초자연적인 신비"가 

뒤섞인 것으로 혼동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는 "미"가 욕망을 채우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순수 이성과 실제적인 이성 외에도 쾌감과 판단력을 갖춘 판단 능력의 존재를 설명했다.

슈르첼, 멘델스존, 모리츠와 같은 학자들은 선을 이루는 일을 "미"라고 분리했다.

선의 완성단계가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바르가르텐은 "미"가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진리와는 달리 감각적인 지식으로 명했다.

 

"미는 마음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이다. 선은 본원적인 미이다.

미와 선이 같은 원천에서 흘러나온다고 그는 가르치고 있다.

미의 근원은 실제적 이익을 수반하지 않는 쾌감이다.

예술이란 관념을 영상의 소산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종교나 철학과 더불어 인성의 가장 깊은 문제와 

정신의 가장 높은 진리를 의식시킴으로써 표현되는 수단이다."

 

"미"가 쾌락인가. 평범한 일상생활 속 욕망이 존재하지 않고도 

쾌락이 부여된다면 그것을 예술로 정의시킬 수 있지 않나.

 

"미란 독립적인 존재성을 가진 그 어떤 것으로서, 전체적 완전, 

정신 관념, 의사, 신의 표현이다. 미는 우리가 체득한 일종의 쾌감이다."

 

만족스러운 쾌감이 없는 예술작을 숭배할 사람은 없다.

다만 모두가 같은 쾌감을 얻는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이유는 과거의 학습기준과 삶의 가치가 모두에게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고전"이라는 것은 단지 대중에게 많은 쾌감을 전해주고 

공감을 얻게 되어 예술이라 평가받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미래 세대들에게도 현재의 쾌감들을 무사히 상속시킬 수 있다면 

지금의 "고전"은 예술로써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군림할 것임이 분명하다.

비판 없이 대중에게 소정된 그릇된 인식은 수정에 앞서 

오랜 "세월의 환기"를 요구한다는 점이 있기는 하다.

 

학파와 학자에 따라 예술은 달리 평가된다.

한 부류는 성적 욕구와 유희적 기호를 예술로, 

또 한편은 흥분과 생리적 진화를 예술로 분리하기도 했다.

어떤 학자는 과거 학습, 즉 경험 때문에 사고하고 습득된 행동, 

그리고 정서에 따라 예술이 분리된다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상처럼 반복 학습으로 인식 속에 주입된 "쾌감"을 예술로 분리, 정의할 수 있나.

 

"어떤 사람이 웃으면 그것을 보는 사람도 유쾌해진다.

어떤 사람이 울면 그것을 보고 듣는 삶도 슬픔을 느끼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이 노하거나 흥분하면 그것을 보는 사람도 똑같은 심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은 상대의 감정을 주위에 감염시키는, 

인간과 인간을 엮어주는 목적을 바탕으로 한다.

 

"예술가가 다른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감정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강한 것, 약한 것, 중요한 것, 무의미한 것, 열악한 것, 선량한 것, 

희곡에 나타난 향토를 사랑하는 정, 운명이나 신에 대한 복종, 

소설에 나타난 사람의 향락, 그림에 나타난 음탕한 감정, 

개선곡에 나타난 용기, 무용에서 야기되는 경쾌함, 해학, 저녁노을의 경치, 

자장가로 불러일으키는 고요의 정, 아름다운 꽃 모양으로 환기하는 

감탄의 감정 등등 이러한 모든 것이 예술이다."

 

"예술의 가치, 즉 예술이 전하는 감정의 평가는 사람들이 

인생의 의의를 어떻게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대중이 지향하는 예술은 "선"이다.

그래서 선한 감정이 전달되거나 교환되지 않는다면 

대중은 그것을 예술로 평가하려 들지 않는다.

"마음속 빛나는 도덕 법칙"은 쾌감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우 예술은 맹목적인 신앙과 무분별한 숭배를 창조하기도 한다.

거기엔 분명 만족스러운 "쾌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다운 예술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결과는 필연적으로 허위의 예술을 

양성한 상류 계급의 부패 속에 나타났다."

 

부풀어진 이기심(amour propre)에 예술의 평등은 사라지고 

"문화의 발전"으로 인해 변질한 자기애(amour de soi)만이 겉으로 표출되지는 않을까.

 

"본래 선하기만 한 자기애는 이기심으로 바뀐다."

- 루소 -

 

"노동자가 격렬한 노동을 하므로 작가, 음악가, 무용가, 배우 등 

전문가가 완성된 영역까지 도달할 수 있으며, 우수한 예술적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 행위를 전혀 모르고 있으며, 

그것을 학습한다거나, 혹 그것들이 전해줄 수 있는 쾌감과 

혜택 여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다만 "예술의 예술에 의한 예술을 위한" 노동을 제공할 따름이다.

이것은 노동자인 필자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어쩌면 이런 상황들이 소수의 예술가에게 

더욱 기교적인 전문성만을 부여해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소수의 예술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다양성의 부족 현상과 주제의 감소 및 고갈이다.

문학에서도 보통 주제의 선정과 내용의 원천은 작가의 사회경험 때문에 그 주관성을 들어낸다.

상징적인 표현, 간접적인 은유, 대상을 감추는 환유법, 수사법, 

직유법, 의인법, 의성법, 의태법, 풍유법, 제유법, 환유법, 중의법, 

그리고 암시가 깃든 표현들은 특수계층만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편견이 흔하고 배타적인 성격조차 묻어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간결함이 드러나는 청순함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뜻인가.

테카당스(Decadence)에서 볼 수 있는 기교, 

퇴폐와 오락성이 짙은 인위적인 표현들을 배척하자는 주장이 들려온다.

 

"내가 결론에서 얻은 것은 점점 고답적일수록 

대다수 민중에게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 때문에 예술이 점차 난해한 영역

(내가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과 함께 서 있는 표준으로부터 볼 때)에 빠져들고 

나중에는 선택된 극히 소수의 사람, 그것도 선택된 소수가 

점차 감소하여 어느 극점에까지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예술적 가치의 기준은 대중이 이해하기 쉬우며, 

누구에게나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잣대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예술작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지급되지 않았을 때 궁핍해진 예술인은 모방, 

즉 "예술의 모조품"과 "물질이 따르는 흥미"를 지향하고 만다.

관객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경우, 예술가는 권태와 욕망을 자극하는 극단적이고도 

경이롭기만 한 표현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참된 예술품은 그 시대 최고의 인생관을 품고 있어야 하며, 

감정을 경험해서 그것을 전하려는 욕망과 능력을 갖추어 어느 것이든 

예술 형식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열 문장을 대변할 수 있는 단 한 구절의 심사숙고한 선택, 

문장의 꼭 맞은 서술어의 호응,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어휘, 

감동이 서려 있고 작가의 사상과 그의 묘사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글이 바로 문학에 속할지도 모른다.

공정한 비평을 거친 작품, 작가의 특출한 감상과 독창적인 색채, 

또 그만의 특유한 기교들이 작품 속에 살아있다면 

그것이 예술로 거듭나는 데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본다.

 

"진정한 예술 작품이라면 마땅히 독창적이고 

전혀 다른 작품과 유사한 점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예술가의 참다운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사회적인 인간 "작가" 역시 사회에 종속되어 있다는 모순과 불협이 존재할 뿐이다.

 

"비극파: 우리에게 비극을! 위대한 비극을!

지적이고, 심오한 주제가 담긴 세계가 깜짝 놀랄 위대한 비극을!

죽음을! 고통을! 죽음을! 기쁨은 물러가라! 안돼! 비극을 갈구하는 영혼!

 

희극파: 우리에게 코미디를! 배꼽 빠지게 웃긴, 생 코미디를 주시오!

비극은 물러가라! 건전한 웃음을! 즐겁고, 재미있는 공연을 합시다!

열정! 재치! 그리고 복잡한 줄거리! 코미디를 합시다!

 

서정파: 서정적인 작품을 주시오. 로맨틱하고도, 감성적인... 장미와 달빛.

강렬한 키스! 연인들의 부드러운 탄식! 꿈, 시적인 공상! 사랑!

- 세 개 오렌지의 사랑 中 -"

 

"자연성이 악화하지 않은 특성을 갖추고 있다면, 

그러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참된 예술품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예술이란 무엇인가?

 

시적인 감성과 흥미를 위주로 하는 심미적인 요소가 담긴 작품을 설명하는가, 

혹 작가의 자아 세계와 그의 독창성에 의미를 두고 있는가.

빨간 깃발을 녹색이라고 말한다면 상대는 과연 어떻게 반응해 오겠는가.

 

"이 사람 이거 제정신이 아니군. 혹시 색맹은 아닌가?" 하겠지만 

한 손에는 빨강, 다른 손에는 노랑을 들고 "오렌지"를 외친다면 

분명 상대에게 은유적인 암시가 전해져 그로부터 미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청중은 상대가 전달하려는 진정한 "정서와 감정" 역시 과연 느끼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가 과연 순수한 표현인지, 또 개성이 있는지 반드시 집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예술을 감역력에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걸었다.

 

"전해지는 개성적 감정의 많고 적음. 전해지는 감정의 정확함의 여하.

예술가의 진심, 즉 예술가가 전하려는 정서를 자기 자신으로 느끼는 힘의 강약."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냉담하고 또 불필요한 감정은 

그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좀 더 친절하고 필요한 다른 감정으로 바뀐다.

이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예술은 인간의 이성과 지각을 통하여 

감정에 이입시키는 인간생활의 한 기관이다."

 

예술이 감정의 진화를 주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감정의 진보가 그릇된 사상을 자각시키고 긍정을 부른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술가는 경험한 감정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활의 안전은 예술가의 진실한 제작에 가장 큰 피해를 미치는 조건이다."

 

생활의 윤택함이 예술적 창작활동을 저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에는 목적이 있다. 또한, 모든 노동에는 나름 저마다의 투명한 목적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예술에는 과연 어떠한 목적이 있을까.

 

"예술은 무엇인가?" 다시금 질문해 본다.

 

 

 

[출처]

pilgrimages.tistory.com/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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