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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면 모든 것이 허약해진다.

체력도 약해지고, 기력도 약해지고, 의욕도 약해진다.

이것이 노약(老弱)이라.

 

 

늙으면 모든 것이 쇠퇴한다. 소화력도 쇠퇴하고 기억력도 쇠퇴한다.

이것이 노쇠(老衰)다.

 

 

늙으면 모든 것이 흐려지고 혼미해진다. 눈도 흐려지고 머리도 흐려진다.

이것이 노혼(老昏)이다.

 

 

늙으면 모든 것이 둔해진다. 이해력도, 활동력도 둔해진다.

이것이 노둔(老鈍)이다.

 

 

늙어지면 모든 것이 쓸모가 없게 된다.

생식능력이 약화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고, 손발의 힘이 없어 힘든 노동을 못 한다.

이것이 노폐(老廢)이다.

 

 

노인은 인생의 폐품이 되고 폐물이 된다.

몸도 빨리 움직이지 않고,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노후(老朽)이다.

 

 

늙으면 악의 지혜가 발달하고 교활해져서 구렁이처럼 된다.

이것이 노회(老獪)이다.

 

 

늙은이의 주름살과 피부와 얼굴과 치아를 보라. 모두 추하다.

이것이 노추(老醜)이다.

 

 

늙어서 분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욕심을 부린다.

이것이 노욕(老慾)이다.

 

 

노욕은 참으로 추하다.

늙어서 망령이 나는 것이 노망(老妄)이다.

 

노망은 추태 중의 추태이다. 늙어서 노망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다.

이런 현상은 모두 노의 어두운 얼굴이요, 추악한 측면이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노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

 

 

노의 밝은 면을 생각해보자. 늙으면 모든 것이 단련된다.

단련되면 무슨 일이나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노련(老鍊)이다.

 

 

노련한 선수의 운동 경기, 노련한 고수의 명강의, 노련한 목수의 뛰어난 솜씨, 

노련한 의사의 탁월한 수술은 우리를 감탄케 한다.

늙으면 모든 일에 숙달되고 원숙해진다.

이것이 노숙(老熟)이다.

 

 

노숙한 화가의 그림, 노숙한 배우의 연기는 우리에게 칭찬과 박수를 자아내게 한다.

늙으면 노련하고 성숙해진다.

이것은 노성(老成)이라고 한다.

 

 

노성의 경지는 최고의 경지이다.

늙어서 대성(大成)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우리는 노대가(老大家)라고 한다.

 

 

이것은 원숙과 도통의 경지다, 서경에 무모노성인(無侮老成人)이란 말이 있다.

노성인을 경멸하지 말라고 하였다. 노성인은 인간의 보배다.

늙으면 정교(精巧)한 경지에 도달한다.

이것이 노교(老巧)이다.

 

 

늙으면 착실하고 성실해진다.

이것이 노실(老實)이다.

 

 

늙어서도 건강하고 힘찬 것을 노익장(老益壯)이라고 한다.

노익장의 늙은이는 젊은이처럼 활달하다.

이것은 노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다.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을 우리는 원로라고 하고 국로(國老)라고 칭한다.

 

원로는 사회의 보배요, 우리의 흠모의 대상이다. 나라에는 원로가 많아야 한다.

오랫동안 어떤 일에 종사하여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뛰어난 사람이다.

원로는 결코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벽련천마의 노력과 끊임없는 수양의 결과이고 도달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경지이다.

 

늙으면 인생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달인은 인생을 달관한 사람이요, 통달한 경지이다.

달인은 인생이 원숙경(圓熟境)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한다.

미국의 노년학(老年學) 연구가인 레이차트는 노인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그중 미래지향적 태도를 보이고 유유자적하면서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원숙경(圖熟境, Mature Group)이 가장 바람직하다.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는 것처럼 소극적으로 

무사안일 속에 은둔하는 장갑형(裝甲形, Armoured Group), 

자기만 책망하고 비관하는 자책형(自責形, Self-haters Group)은 남은 삶을 더 힘들게 한다.

어떤 성격, 어떤 인생관, 어떤 생활태도, 어떤 정신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서 노인의 행동형이 달라진다.

 

인간의 나이에는 세 종류가 있다.

먼저 호적상의 나이가 있고, 신체적 나이가 있다.

호적상의 나이는 75세라 해도 50대 같은 건강과 정력을 가진 이가 있다.

이것은 체력 나이요, 기능 나이다.

 

정신적 나이도 있다.

75세의 노인인데도 40대의 기억력과 판단력과 학습력을 가진 이가 있다.

그는 정신 연령이 대단히 젊다.

호적상의 나이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신체적 나이와 정신적 나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정신적 나이다.

심로신로(心老身老)요, 심불로신불로(心不老身不老)이다.

항상 젊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라. 그래야 신체적 나이가 젊어진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젊은 사람이 있다.

몸은 젊었지만, 마음은 항상 늙은 사람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젊게 갖는 것이다. 정신적 젊음과 신체적 젊음은 같이 온다.

이것이 노화(老化)를 방지하고 젊음을 오래 유지하는 비결이다.

 

 

 

우리는 노후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노후의 경제적 생활 태도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적 대책이다.

후자의 문제를 주로 논하기로 한다. 늙은이는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다.

앞으로 남은 10년, 20년, 30년, 이 긴 시간을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확고한 정신적 대책을 확립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당신의 인생은 권태(倦怠)의 연속이다.

고독감의 지겨운 시간이요, 허무감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이생의 불행한 연속이다.

우리는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만 아름답게 늙고 지혜롭게 늙고 보람 있게 늙을 수 있는가.

이 노년의 근본 문제가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나는 이 물음에 대하여 네 가지 대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우리는 확고한 사생관(死生觀)을 확립해야 한다.

언제 죽더라도 태연자약(泰然自若)이 확립될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준비를 해야 한다.

60세 위대한 생애로 산 도산(島山)은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우리는 이런 경지에 도달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냉혈한 마음으로 죽음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죽음은 예외 없이 그리고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죽음의 신은 냉혈하고 비정하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죽음의 기능성을 가진다.

죽음의 신은 바로 내 옆에 살고 있다.

죽음의 신이 아슬아슬하게, 숱하게 내 옆을 지나가고, 

언제나 내 뒤를 따라다니고, 내 앞에서 너를 지켜본다.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의 말과 같이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이다.

 

죽음은 生의 종말(終末)이요, 생의 부정(否定)이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간다.

그러나 생활에 쫓기어 죽음을 망각하기 쉽다.

그래서 중세 유럽에서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그들은 다음 말도 항상 잊지 않았다.

 

"인간이여 기억하라. 너는 티끌이요, 티끌로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티끌 속에서 살다가 티끌로 돌아간다.

우리도 언젠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의지만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야 한다.

이 엄연한 사실을 깊이 자각할 때 우리는 성실해지고, 

진지해지고, 엄숙해지지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잠시 몸을 맡기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음은 남이 대신해줄 수 없다.

내가 남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고, 남이 나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죽음을 죽어야 하고, 너는 너의 죽음을 죽어야 한다.

독생독사(獨生獨死)가 인간의 운명이다. 죽음의 길은 동행(同行)할 수 없다.

우리의 부모 처자가 홀로 죽는 것을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볼 따름이다.

죽음은 인간의 가장 고독한 행동이다. 죽음은 인간 실존(實存)의 가장 숙연한 한계 상황이다.

 

죽음은 경험을 거부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경험해 볼 수 있다.

공부도 해보고, 여행도 해본다. 그러나 죽음은 경험해 볼 수 없다.

우리는 죽어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죽어버린다.

그러므로 죽음이 어떤 것인지, 고통스러운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편안한 것인지 경험해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사후의 생이 있느냐 없느냐?,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영혼은 멸이냐? 불멸이냐?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수수께끼다.

사후의 문제는 지(知)의 대상이 아니고 신(神)의 영역이다.

 

죽음은 마지막으로 종말(終末)이다. 죽음과 더불어 지상의 나의 생은 영원히 끝난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나는 다시 이 세상에 환생할 수 없다.

죽는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는 것이요, 떠나는 것이다.

사즉무(死卽無)요, 사즉거(死卽去)다.

따라서 떠난다는 것은 한없이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본가지의 세계로 떠나야 한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 처자와 애인과 친구와 조국과 고향과 

자연과 하늘과 꽃과 학문과 예술과 자유와 

사업과 환락과 기쁨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두고 혼자 떠난다는 것은 가장 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는 견딜 수 없는 슬픔과 허무감이 따른다.

죽음은 인생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는다. 죽음 뒤에 나는 어디로 가는가.

불안감과 허무감과 공포감과 비애감은 죽음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감정이다.

 

깊이 종말을 생각하라.

우리는 젊어서부터 노년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죽음에 대해 각오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온종일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완벽한 잠을 잘 수 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안락한 잠을 잘 수 있다.

인생을 성실하게 열심히 산 사람만이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둔다. 인간은 노력한 만큼 보답을 얻는다.

사람으로 태어나 나의 사명과 책임을 다했다는 

만족감과 자신을 가질 때 우리는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

먼저 확고한 사생관을 확립하고 죽음에 대한 정신적 준비를 하여라.

 

 

 

둘째, 우리는 고독을 견디는 힘을 길러야 한다

 

노년의 인생은 고독과 싸움이다. 고독을 견디려면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아들, 딸이 자주독립 하여 나의 슬하에서 멀어지고, 

정다운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평생 동고동락한 배우자가 별세하면 심한 고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제부터 혼자 살아야 한다.

같이 웃을 친구가 없고, 서로 얘기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한 일은 없다.

고독은 견디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이다.

고독은 인간에게서 활력을 빼앗고, 생기를 박탈하고, 목숨을 앗아간다.

세상에 고독을 느끼지 않는 노인은 없다. 고독은 노인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는 고독을 참고 견디고 이겨야 한다. 우리는 고독에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고독을 이기기 위하여 우리는 평소에 풍요한 마음을 꾸준히 준비해야 한다.

풍요한 마음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독에 강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이 풍성하고 정신력이 강해야 한다.

마음이 풍성한 사람은 관심이 다양하고 애정이 깊으며 취미가 넓다.

취미가 메마르고 마음이 빈곤하면, 관심이 좁고 애정이 없으며 사색이 빈약하다.

고독에 견딜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준비하려면, 종교와 신앙이 필요하다.

 

 

 

셋째, 자기 일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한평생 추구하는 생의 업(life work, lebenz werke)이 있어야 한다.

생즉동(生卽動)이다. 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다. 할 일 없는 인생은 지옥과 같다.

일거리가 없는 생활은 허무하고 무의미하다.

일생의 고독을 이기려면 평생 추구하는 일과 항상 몰두할 수 있는 취미가 있어야 한다.

일과 취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서예에 몰두하거나, 독서에 심취하거나, 그림에 열중하거나, 전각에 몰입하거나, 

작품을 쓰거나, 서화를 수집하거나, 바둑을 즐기거나, 수석을 모으거나, 

등산을 하거나, 자기의 전문과 취미에 맞는 일을 가져야 한다.

일에 몰두할 때 우리는 인생의 충실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무위도식의 생활은 허무감과 권태감만 느끼는 괴로운 생활이다.

 

 

 

끝으로 정신관리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항상 기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과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환희와 평화와 감사가 충만해야 한다.

마음이 밝고 넓고 따뜻한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인생을 아름답게 살려면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생즉락(生卽樂)이다.

독서건 음악이건 낚시건 스포츠건 등산이건 낙의 세계를 가져야 한다.

낙이 없는 인생처럼 쓸쓸하고 메마른 것이 없다.

우리는 생을 즐기고, 책을 즐기고, 예술을 즐기고, 자연을 즐기고, 일을 즐겨야 한다.

낙생인(樂生人)이 되어라. 낙천인(樂天人)이 되어라.

 

일찍이 지혜의 스승인 공자는 유어예(遊於藝)라고 하였다.

예술을 즐기고 예술 속에서 살라고 하였다. 즐긴다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모든 일에는 지(知)와 호(好)와 낙(樂)의 세 단계가 있다.

음악을 아는 것보다는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더 좋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음악을 즐기는 것이 더 좋다.

낙은 최고의 단계이다. 낙의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낙의 단계에 도달하려면 오랜 수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되, 공부를 즐기는 사람은 드물다.

일을 하되, 일을 즐기는 사람은 적다. 일을 하되, 일을 즐기지 못하고 일을 괴로워한다.

그들은 지(知)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호(好)의 단계에 이르지도 못한다.

하물며 낙의 단계랴? 세상에는 지(知)의 인(人)도 많고 호(好)의 인도 있다.

그러나 낙(樂)의 인은 매우 드물다. 낙에 도달하려면 노력하고 정성껏 갈고닦아야 한다.

 

우리는 노년의 생을 즐겨야 한다. 우리는 노년의 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중국의 고전인 『역경(易經)』에 이런 명언이 있다.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

하늘을 즐기고 내명을 알아라. 그러면 근심이 없다.

자기의 천명(天命)을 알고 즐기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낙천지명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공연히 세상을 비관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인생을 어둡게 살아가는 염세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밝은 마음과 기쁜 표정으로 

자기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면서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라.

 

인생을 아름답게 늙고 보람 있게 사는 비결이 무엇이냐, 

나는 다시 한 번 네 가지 지혜를 강조한다.

 

첫째,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여라.

 

둘째, 고독을 견디는 힘을 길러라.

 

셋째, 평생 추구하는 일과 취미를 가져라.

 

넷째, 기쁨과 평화와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라.

 

 

 

[출처]

www.ohseayoung.com/?p=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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