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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가담하는 모든 사람이 돈을 받을 때 오직 한 명만 돈을 받지 못한다면 누구일까?

 

이런 직업이 있다. 대부분 한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 일에 종사하며 보통 몇 개월에서 때로는 몇 년, 

그리고 평생에 걸친 작업을 특수한 창조성을 바탕으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다.

그렇지만 보수는 없거나 아주 적다.

 

당신은 이런 직업에 종사하겠는가? 왠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예술가가 왜 가난하냐고?"

 

"예술이란 이런 직업을 말한다."

 

"그리고 예술가란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무슨 대답이 더 필요할까. 제대로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봤을 때 제대로 보수를 받는다면 상황은 좀 더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재미없고 오래된 미신이 있다. 이렇게 시작한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다. 그럴 리가 없다.

샘솟는 상상력과 예술에 대한 열정, 

거침없는 그들의 삶에 가난이 들어갈 틈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설령 가난이 그들의 삶에 휘몰아치더라도 예술가는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고독하지만, 오히려 고난과 역경 속에서 피어난 예술은 

그 무엇보다 진실한 삶을 반영할 것이며 그런 예술은 아름답고 값지다.

오, 예술이여, 영원하여라!"

 

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미신 속에서 예술가는 가난하다.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굴욕적인 대우를 받은 

아프리카 예술가들에게 관리인들이 내뱉은 말도 이런 것이었다.

예술이 아름답고 값지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도 아름답고 값지게 대우해야 한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서 

"예술가"가 뜻하는 가장 단순한 사실이 잊혀서는 안 된다.

예술가도 사람이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숨 쉬고 배설하는 육체성을 가지고 있다.

가난한 삶이 예술가에게 필수라거나 가난 속에서 

예술혼이 피어난다는 것은 질 나쁜 미신에 불과하다. 가난이 행복한 일일 리 없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이란 예술가에게도 똑같이 쾌적하지 않은 환경을 제공한다.

굶주림과 질병과 굴욕에 노출한다. 그런 상태에서 삶이라는 것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설득할 필요가 없다면 나 또한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예술가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또 다른 오래된 미신에 관한 이야기다.

현재 미술 작가들은 보수를 받지 못하지만 

어떤 작가들은 이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예술 활동이라는 것은 돈의 가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무엇보다 예술의 가치를 믿기 때문에 작업 활동에 대한 보수는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창작 활동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찾아 헤맨다.

별도의 임금노동을 해보는 것이 창작 활동에 얼마나 큰 

경험적 자산이 되는지에 대해서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전 세계의 미술가들이 참여하는 미술 사이트 이-플럭스(e-flux)에서 

2011년에 출간한 [Are You Working Too Much? Post-Fordism, 

Precarity, and the Labor of Art]의 서문을 보면 이런 언급이 있다.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작업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직업들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확고한 아마추어리즘이다."

 

더불어 예술가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어쩌다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업 활동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보수를 받는다고 해서 예술의 미적 가치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열심히 작업해놓고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데서 

만족을 느껴야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만족, 

자기 동기 하나만으로 가냘프게 지탱되는 만족에 해당할 뿐이지 않을까?

 

미술 작가들은 전시할 때 대부분은 한 푼도 받지 못한다.

물론 작품 제작비 명목으로 돈을 받긴 하지만 작품을 제작하기에도 모자라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 중견 작가는 미디어아트 작가로서 오랜 활동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활동을 하면 할수록 빚만 쌓여가는 자신의 처지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언론에 공개한 적도 있다.

그러니 신진 작가들의 처지야 뭐, 좋을 리가 있겠나.

국가 예술기금에서는 전시를 기획하는 데 있어 작가 자신의 보수를 책정할 수 없게 되어 있고, 

국공립 미술관은 작가 보수에 해당하는 아티스트 피(Artist fee)를 

예산에 책정할 수 있는 조항 자체가 아예 없다.

그래서 국공립 미술관에 워크숍이라도 하러 가게 되면 

참가한 미술 작가에게 항목 자체가 없는 사례비를 주기 위해 

큐레이터와 감독들이 진땀을 빼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예술은 일반적인 노동과는 다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임금노동보다 특별히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다.

보수로 따지자면 오히려 예술은(겉은 매우 화려해 보일지라도) 

별로 좋지 않은 임금노동 조건과 유사할 따름이다.

예술이라는 행위, 활동이라는 것은 하나의 노동 형태로 정의되지 못할 만큼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이 조금은 복잡한 다른 형태의 활동이라고 인정한다고 해서 

아무런 보상도 필요치 않은 고귀한 활동이라고 쉽게 비약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예술이라는 활동이 조금은 복잡한 양상을 띠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수를 책정하는 데 좀 더 세밀한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영국의 예술가정보회사(Artist Information Company)에서 

미술가의 예술 노동에 대한 보수와 아티스트 피 책정을 위해 

작성한 매뉴얼을 보면 이러한 작업이 굉장히 어렵고 복잡하며 

다른 여러 가지 예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첨언이 반복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데도 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작업이 

어떤 이유로든 회피되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술 작품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 자리에 위치하는 때는 대부분은 "전시"라는 형태를 통해서고 

미술가는 그 전시를 만드는 하나의 주체로 참가한다.

단순히 온 힘을 들여 작품만 만들어놓고 

도록 한 권 받아 들고 떠나는 이슬 먹고사는 영혼이 아니다.

기관, 큐레이터, 테크니션, 학예사, 비평가 등과 함께 

전시를 가능하게 하고 전시를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주체다.

다른 주체들이 이 일에 대해 보수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 또한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

한국에는 예술 활동을 진흥한다는 위원회가 있고 

예술의 사회에 대한 공공적 역할을 기대하는 크고 작은 미술관과 미술 시설이 있다.

작가에 대한 보수는 이러한 제도가 있는 한 최소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보장된다고 해서 예술의 미학적 가치가 손상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이 문제는 그 영역에 있지도 않았다.

 

 

 

[출처]

naver.me/5lyQS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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