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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지식의 과시가 속셈인 책 읽기는 빛이 아니라 빚일 뿐이다.

책 읽는 사람이 경계해야 하는 건 바로 책에 대한 맹신이나 과욕이다.

내 것으로 추동되지 않는 독서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상실한 책 읽기다.

지식은 축적될지 모르지만 삶은 축적되지 않는다.

책은 무뎌진 내 삶을 성찰하고 삶의 속도와 영혼의 속도를 조절하는 계기판이다.

 

 

책에 대한 과신도, 과시도 부작용을 낳는다.

단 한 줄의 문장이더라도 그게 내 가슴으로 파고들어 

삶의 한 귀퉁이를 마련하면 그것으로 이미 책은 모든 소명을 충분히 실현한 셈이다.

 

 

겸손은 말과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낄 때 실존한다.

 

 

인문 정신은 역동적이다.

물론 때론 아주 조용히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인문 정신은 역동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시대정신과 미래 의제가 결여된 인문 정신은 존립 자체가 불가하다.

그저 머릿속에서만 잠시 머무는 성찰과 지식이어서는 안 된다.

 

 

여행의 진짜 즐거움은 지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속박의 정체를 모르고 떠나는 건 새로운 속박으로의 변형일 뿐이다.

여행은 속박으로부터 해방뿐 아니라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느끼며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선물로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행은 "내가 나에게 주는" 보상이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자유롭지 않다는 건 일종의 형용모순이고 자기기만일 수 있다.

자유가 빠진, 목적지에 매달리는 여행은 이미 구속의 일부이다.

 

 

미래는 늘 낯설게 다가온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대면하기 불편하고 때론 두렵다.

그래서 현재에 안주하고 싶어진다. 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가 된다.

그러니 현재의 급진이 미래의 진화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머뭇거릴 까닭이 없다.

삶에서도 급진이 필요하다.

다만 동시대로부터 비난과 억압과 질시를 받을 것이고 때론 오해를 자초할 것이며 

심지어 아주 패악한 인간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부재가 공간의 허전함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로 다가올 때 진정한 사랑이다.

낯섦은 삶의 질감을 강화한다.

 

 

그 어떤 시간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미 살아서 지나간 시간이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시간은 맞닿은 채 부대끼기도 하고 토닥이면서 이어진다.

특히 한 사람의 삶의 시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만 할 것도 아니고 곧 맞을 시간도 설레기만 할 것도 아니다.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이 바로 지금 맞닿아 있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그저 그런 하나의 순간이 아니다.

 

 

3, 40대에게 "비움"은 어색하다. "채움"으로도 바쁜데 비움이라니.

그러나 비움은 탈진이나 방전이 아니다.

비움은 재충전의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며 채움의 재조정이다.

덜어내지 못하면 채우지 못한다.

다만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를 알아야 하는 나이다.

20대와 다른 점은 그것을 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서른은 날것처럼 펄떡펄떡하던 청춘이라고 떠들기엔 이미 계면쩍은 나이다.

젊지만 청춘은 아닌, 그 모호함만큼이나 30대는 여기도 저기도 아닌 시기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20대 청춘의 피가 아직은 식지 않았고, 

40대의 노련미를 조금씩 익히고 있는 양수겸장의 넉넉함을 지닌 시기이기도 하다.

 

 

모두 제 나름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게 삶이다.

그러나 큰길만 바라보며 살기보다는 골목길도 누벼보고 외딴길도 일부러 찾아보며 

길에서 여러 사람 만나고 많은 것을 느끼며 살아갈 일이다.

 

 

종교나 신앙은 자유가 본질이다.

미망이나 권위에 흔들리거나 억압되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지켜낼 힘을 내 안에 마련하는 것이니 그것은 자유의 원천이다.

그런데 자유를 버리고 오히려 강요와 억압을 행사하는 건 폭력이지 종교가 아니다.

 

 

익숙함을 내려놓지 못하는 여행은 이미 여행이 아니다.

낯선 풍경에만 취할 게 아니라 낯선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무가 있다는 건 산소가 아직 제법 남았다는, 자연의 표식이다.

내 삶의 나무 한 그루쯤은 마련해둬야 한다.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에 가고, 현재를 보려면 시장에 가고, 미래를 보려면 도서관에 가라.

 

 

현대인은 고독의 가치를 잃고 산다. 고독은 쓰고 괴로운 게 아니다.

고독은 온전히 내게만 몰입하고 나와 세상이 일대일로 맞서는 상황이다.

그런데 고독을 피한다. 두려워한다. 고립과 혼동한다.

고립은 타의적 고독이라서 괴롭다. 따돌림이다.

그 따돌림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아이도 어른도 두렵다. 그래서 피하고 싶다.

그러나 고독은 자발적 고립이다. 따라서 고립은 주체적이다.

모든 불필요한 것을 배제하고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향하는 내밀한 시간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신을 되찾을 길을 상실한 것과 다르지 않다.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

가방에 담긴 책 한 권이 언제나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일에 늘 두렵고 겁먹는다.

그리고 몇 번 그 겁을 경험하면서 적당히 스스로와 

타협하면 나도 모르는 새 비겁의 영토로 넘어간다.

그러니 늘 깨어있어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모른 척하고, 

맞서 싸워야 할 것을 외면하는 비겁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 자신을 어떤 울타리에 가두는 것. 그것이 바로 한계다.

그러나 활을 한꺼번에 너무 센 힘으로 당기면 시위가 끊어질 수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야 깨뜨려야 할 지점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나도 모르게 그 한계를 깨뜨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나를 괴롭혔던 한계라는 걸 깨닫기도 한다.

 

 

끝까지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성취한 것, 도드라지게 뛰어난 것 어찌 자랑하고 싶지 않을까만 

그건 더부살이로 얹힌 부록일 뿐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

그걸 뻐길 것도 없고 내가 늘 상대에게 주었다고 위세 부릴 일도 아니다.

오히려 더 못 줘서 미안하고 안타까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의 요체다.

 

 

진정한 강자는 자신을 고집하거나 자신의 능력과 힘을 과신하지 않는다.

어설프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건 열등감의 발로다.

그런 사람은 타인을 너그럽게 품지 못한다.

그러나 외적인 권력이나 재력은 없어도 자기 내면이 튼실한 사람은 

타인에 휘둘리지 않으며 동시에 타인을 억압하거나 강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정한 관용은 참된 강자의 몫이고, 결국, 관용을 지닌 사람이 진정한 강자가 된다.

 

 

시시하게 살지 않아야 그대를 시시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소중하고 귀한 것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없고 쉽게 얻어서도 안 된다.

그러니 허투루 살 수 없다.

 

 

부모는 부모 대로 힘들고 세상이 매워서 제 몸 건사하기도 버겁다.

그래서 청춘들을 공감할 틈이 없고, 그러니 대책을 세우거나 환경을 마련해주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격려인지 조롱인지 청춘의 삶은 원래 그렇게 시련을 겪는 것이며 

그 뒤에는 저절로 좋은 삶이 올 거라고 지껄인다. 그건 기만행위다.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해야 하는 게 먼저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건 조롱이지 격려가 아니다.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지, 그 병을 이겨낼 방편이 있는지를 먼저 묻고 따져야 한다.

 

 

삶의 리듬은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일이 그렇게 만드는 것만도 아니다.

내가 적당히 조절하며 때론 밭게 때론 성기게 조절해야 한다.

잠깐의 산책과 짧은 명상만으로도 하루의 리듬은 매우 발랄해진다.

휴식이나 휴가라는 게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틈틈이 자신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한 만큼 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회 또한 그런 조건을 마련하고 그런 분위기를 끌어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신이 허락한 생명은 그 어느 것 하나 가벼운 게 없고 가난을 세습하여 아이들까지 

대대로 그 고통을 겪으며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 사슬의 고리를 깨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몫이고 의무다.

 

 

어떤 이는 나이 들면 저절로 보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견해를 단호히 거부한다.

중년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의무로서의 삶을 어느 정도 마쳤으니 

비로소 권리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기이며,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 없는 도전과 전진을 누려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나이 들어갈수록 오히려 진보적이어야 한다.

살아오면서 알게 된 것들, 겪어온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이 나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외려 

내 발목을 잡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발목을 잘라내고 싶다.

 

 

- 책 본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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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문학자인 김경집이라는 분이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겪었던 이야기들을 쓴 여행 에세이+교양 인문학책이다.

 

저자인 김경집은 서강대학교 영문과와 같은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한 후 

가톨릭대학교 인간학 교육원에서 25년 동안 인간학을 전담하여 가르치다가 

학교를 떠났고 그 후 글을 쓰고 강연도 하면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인문학자라고 하며 

최근에는 "김경집, 정영진의 빨간약"이라는 팟캐스트 방송도 하고 계신다고 한다.

 

저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이 그냥 제목만을 보고 읽게 된 책이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가치들을 18가지 주제를 통해 이야기하는데 

기본적으로 에세이 형태의 글이다 보니 개인적 성향 등에 따라 내용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며 

또 히말라야 트레킹이다 보니 기행문 느낌도 있는데 현지 사진 한 장 없이 글로써만 이야기하기에 

저자가 느꼈던 주변 풍경에 관련된 내용이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저자가 가본 지역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일일이 인터넷 등을 통해 찾아봐야 한다.;;)

 

저자가 책 프롤로그에 "이 책은 히말라야 기행문도 아니고 

여행안내서도 아니며 답사의 기록물도 아니다."라고 했기에 

사진 한 장 없는 것에 대해 이해해 주려고 했으나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가본 지역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증이 미치도록 밀려왔다.;;;

그래서 읽으면서 좀 답답하기도.

 

결국, 이 책은 기행문+인문학+약간의 자기계발서 느낌이 들었던 책이다.

좋은 주제들을 담고 있는 책이긴 한데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느낌이랄까.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다고 볼 수도 없는 책이라 독서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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