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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계속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훌륭한 인생이다. 그대로 가면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라는 짧은 여행의 마지막 여정까지, 그렇게 철이 덜 난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

내 삶에 단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진정한 프로"가 되는 것, 이것이 삶의 행복과 인생의 성공을 절반 결정한다.

그런 점에서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일이 아니라 놀이를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

일이 먼저가 아니다. 놀이가 먼저다.

 

 

놀이는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행복한 삶의 핵심 요소이다.

경마 배팅, 카지노 도박, 주식 투자도 그것이 돈을 따기 위한 

도박이 되기 전까지는 즐거움을 위한 놀이가 될 수 있다.

음주와 포르노 감상도 적정한 범위에서는 놀이가 된다.

중요한 건 노는 즐거움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나 승리를 목적으로 삼으면 놀이가 더는 놀이가 아니게 된다.

노는 시간과 방법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기 결정권을 상실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놀이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세상에 해서는 안 될 놀이는 없다.

놀이와 일 사이에 가치의 우열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성공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소신껏 인생을 사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산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성공이라고 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한 좋아하는 일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포기하고 산다면, 

그 인생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다.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품위 있는 인생, 존엄한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고 살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만, 기본은 "쓸모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밥을 먹기는 먹어야 한다.

밥을 먹으려면 어디엔가 쓸모가 있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

분업 사회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스스로 밥벌이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생계를 타인의 자비심에 의존하면 존엄한 삶을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어 생계를 이어가려면 꾸준히 일해야 한다.

아무 직업도 없이 놀기만 하면 자부심을 느끼기도 어렵고 남들에게 인정받기도 힘들다.

놀이는 삶의 위대한 영역 가운데 하나이지만 놀이만으로는 삶을 의미로 채울 수 없다.

일할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

 

 

자기 힘으로 삶을 꾸려가야 존엄과 품위를 지킬 수 있다.

늙어도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설계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를 제대로 준비해야 하는데 돈, 건강, 그리고 삶의 의미이다.

 

 

인생의 성공은 멀리 있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것을 남들만큼 잘하고, 

그 일을 해서 밥을 먹고 살면 최소한 절반은 성공한 인생이다.

돈 때문에, 남의 눈을 의식해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또는 사회의 평판 때문에 즐겁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다면 

그 인생은 처음부터 절반은 실패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꼭 즐겁지 않더라도 최소한 괴롭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

 

 

인생은 소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냉혹한 과정인지 모른다.

원대한 꿈과 낭만적 열정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직업을 잘 선택하려면 열등감을 극복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어디를 가든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남들이 어떤 직업을 선호하는지 의식하지 말아야 하며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고르면 된다.

즐기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 일하게 되면, 이겨도 남는 게 없고 지면 최악이 된다.

 

 

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끝없는 경쟁 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통과 인간관계의 비결은 자기의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타인을 미워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섣불리 평가하려 하기보다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교감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

바꾸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

 

 

사업을 하든, 기업이나 정부에서 조직 생활을 하든, 

일을 잘하려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뜻이 아무리 옳아도 사람을 얻지 못하면 그 뜻을 이룰 수 없다.

 

 

평범해도 평범하지 않아도, 인생은 훌륭하거나 비천할 수 있다.

인생의 품격은 평범함이나 비범함과 상관없는 것이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세상에는 오르지 못할 나무가 너무나 많다.

곳곳에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서 있다.

도전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와 

넘을 수 없는 벽에 매달려 인생을 소모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모든 나무와 모든 벽을 오르고 넘어서야 행복한 삶,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게 적합한 나무, 노력하면 넘을 수 있고 넘는 게 즐거운 벽을 잘 골라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인생이라는 "너무 짧은 여행"을 후회 없이 즐길 수 있다.

 

 

자살 그 자체를 불행이나 죄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때로 자살은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와 존엄을 찾는 수단이 되며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 세계는 삼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정신은 아홉 개 또는 열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다.

그것들은 장난이다.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 하루 그 의미를 충족하는 삶을 살았는지 판단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우리는 각자 정체성이 다른 자아들이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 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인생의 품격과 성패를 결정짓는 중대사이다.

그저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하려는 관념의 유희가 아니다.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리 큰 상처를 받아도 다시 일어나 스스로를 치유한다.

반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은 작은 불운에도 쓰러지고 만다.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혀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훌륭한 삶, 

품격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나름의 견해를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삶과 함께 죽음도 알아야 한다.

죽음을 모르거나 오해하면 삶을 망칠 수 있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삶이 죽음보다 좋은 건 아니다.

삶이 견디기 힘들어서, 또는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숱하게 많다.

자살을 용기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도 용기만 있다고 해서 마냥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이 없으면 삶도 죽음도 주체적 선택일 수 없다. 삶은 습관이고 죽음은 패배일 뿐이다.

 

 

가난은 그저 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직, 고금리 사채, 일하고 또 일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 

사업 실패... 이런 것들은 때로 마지막 자존심까지 무너뜨린다. 삶을 욕되게 느끼도록 만든다.

사람은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조차 지킬 수 없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자살은 단순한 충동의 표출이 아니다. 누구도 가벼운 마음으로 자살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마치 한순간의 분노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직접 동반하는 것보다 더 혹심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은 끝에 자살을 감행한다.

우리 각자는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생활 사건이 주는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사회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 삶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는 동안만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먼 훗날, 또는 긴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옳다.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나 스스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만 내 죽음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죽어야 하고 잊힐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는 이 일이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죽음은 무작정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차분히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비천함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생존을 도모할 수 없을 때는 존엄한 삶을 생각하기 어렵다.

죽음이 예측할 수 없는 재앙처럼 다가올 때는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존엄한 삶을 추구하는 것과 함께 존엄한 죽음을 준비해야 마땅한 세상이다.

 

 

신성한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존엄성이며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는 살고 사랑하고 죽을 자유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도덕과 법률의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의 뜻을 구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기쁨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벗어날 수 없는 고통만 남은 상황에서,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삶을 이어나가는 데 스스로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자유의지에 따라 죽을 권리를 인정해주자.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사람이 없다면 그대는 잘못 산 것이다.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며 산 것이다.

사랑의 대상은 제한이 없지만 가장 깊고 황홀한 사랑은 

"성적 교감을 토대로 한 사랑"이라고 나는 믿는다.

성적 교감 위에서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껴안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가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절대 고독을 벗어날 수 있다.

성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맺어진 인생의 동반자가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이성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동성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매개로 한 관계라면 그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자식은 부모의 꿈이나 희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자신의 소망을 자녀에게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옳다고 믿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강제해서도 안 된다.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할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자기 결정권을 제약당하거나 빼앗긴 사람의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좋은 양육은 가훈이나 규칙을 정해두고 예의범절을 익히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를 사랑해주고 부모 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양육의 핵심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아이들 스스로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설계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나만의 세계에 집착하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해 고립될 수 있고, 

대중의 취향만 따라가다 보면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하지 못할 수 있다.

문화예술 분야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갈등이다.

 

 

개인이 생존하는 데는 사회적 결속과 유대, 상호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이기는 능력뿐만 아니라 

타인과 쉽게 공감을 이루어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타인의 기쁨뿐만 아니라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주의는 만인의 것이다.

누구든 유전적으로 무관한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지원을 기꺼이 내놓는 자발성을 발휘한다면 그 사람이 진보주의자다.

 

 

사람은 그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누구도 타인에게 어떤 이념이나 공동선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느끼는 만큼,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고 

또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참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신념에 따른 삶과 죽음이 훌륭하려면 그 신념이 훌륭해야 한다.

그러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신념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이며 그 신념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을 갖추는 것이다.

빛나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말 빛나야 할 것은 자연이 준 본성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실현하면서 영위하는 기쁜 삶이다.

 

 

나는 평지에 솟아오른 돌멩이가 아니다.

숱한 고비를 넘기며 이어져 온 가족사의 굴곡 어디엔가 놓인 존재이다.

그 굴곡을 알아야 내가 진짜 누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더 잘 알 수 있다.

가족사를 탐색해보라. 당신의 내면이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훌륭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훌륭한 인생, 행복한 삶은 죽음 너머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 책 본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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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재 방송인이자 작가인 유시민 님이 쓰신 유시민의 인생론이 담긴 에세이 책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이 워낙 인기가 좋기에 책을 대출받기까지 

한 달 반 정도를 기다린 끝에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이후 두 번째로 읽어 본 

유시민 작가의 책인데 논리적으로 글 쓰는 방법이 주제였고 

평소에 잘 모르던 단어들이 많이 나와 읽기 어려웠던 

"글쓰기 특강"보다는 이 책을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단,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책을 "읽기"가 쉬웠단 이야기지, 

그 안에 담고 있는 주제들은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주제들이 여럿 담겨 있다.

평소에 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삶의 의미와 죽음 등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게 이 책은 커다란 동기를 부여한다.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현재 심각하게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길 권장한다.

 

그러나 "무신론"을 싫어하거나 "자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진보"적인 이야기에 치를 떠는 사람들은 정신 건강상 읽지 말기를 바란다.

 

책을 2013년에 출판했기에 당시(2013년)까지 겪었던 사건들 위주로 이야기하므로 

현재(2018년)와는 시대상이 조금 달라 책에서 약간 옛날 느낌이 날 수 있다.

책이 출판된 후 세월호 사건과 탄핵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했기에 향후 개정판 같은 게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철수를 평가하는 부분도 지금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할 것 같고.

그리고 자살을 하더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자살은 하지 말라는 내용을 좀 넣어줬으면 하는.;;;

그리고 책 내용 중에 글쓰기에 관련된 내용이 약간 있는데 

이게 "글쓰기 특강" 책에도 비슷하게 실려있다. "우려먹기"가 아닌지.;;

 

이 책을 읽은 후 유시민이라는 인간을 다시 보니 그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책을 좀 이른 나이에 쓰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읽어서 손해 볼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에 읽어보시길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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