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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불만과 콤플렉스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든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방식이든 

내 안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채워 넣으려는 욕구, 즉 콤플렉스가 이야기를 만드는 동력이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나"라는 개인을 유지하는 것에서 모든 이야기가 출발한다.

그러나 어떤 사건에서 내가 겪은 슬픔, 즐거움, 

분노를 만화에 그대로 표현하면 그건 사적인 일기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한 발 멀리서 자신을 살펴보고, 내 생각을 정돈해서 표현해야 

나중에도 부끄럽지 않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다.

 

 

혼자 읽을 일기는 자기 자랑이어도 된다.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람의 자기 연민 가득한 고백이어도 좋다.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도 된다.

하지만 작품으로 독자와 만나는 작가라면 자신이 그리고 있는 것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를 억누를 수 있지 않으냐는 말이 종종 나오곤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느끼는 문명화 된 세상일수록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거나 희화화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긴 어렵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올바름 안에서 어떻게 재미를 추구할 수 있을지 

새롭게 모색해 보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윤리를 떠나서 

작가로서 더 오래가려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포커를 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내 앞의 패를 확인하는 거잖아요.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마치 내 앞에 최고의 카드패인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시가 있어야만 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식이에요.

하지만 실제로 게임에서 그런 경우는 없잖아요.

원 페어 패가 나왔으면 그 패로 게임에 참가해서 이기는 법을 찾아봐야죠.

만화에서도 당장 내가 가지고 있는 패가 만화가 연결되는 게 아닐 수 있어요.

그림을 엄청나게 잘 그리거나 천재적인 스토리텔링을 하는 게 아닐 수 있죠.

하지만 자기가 가진 다른 무언가로 만화에서 승부를 볼 수도 있죠.

 

 

사람들이 무척 자주 간과하곤 하는 데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 경험 자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경험을 쌓는다."라는 표현은 너무 관용적이라 그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경험하는 것만으로 경험이 "쌓이는"건 아니다.

모든 노력은 이 노력을 왜 하는지, 지금 하려는 목적에 

이 노력의 방식이 맞는지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성공하든 실패를 하든 그걸 바탕으로 다음 단계에 오를 수 있다.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이 돋보이는 만화가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보단 소위 "졸라맨" 그림으로라도 

네 컷 만화를 완성하는 사람들이 만화가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에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다.

하지만 개인은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한 직업에 자신을 걸 수 있을지언정, 

어떤 직업도 몇몇 사람들의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흔히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를 

해당 직업으로 돈을 버느냐 벌지 않느냐로 본다.

이것은 퀄리티의 문제나 상업적인 욕심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직업엔 자기 만족적인 면이 있지만 프로페셔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회적 분업의 입장에서 대중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흔히 꿈의 크기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도 비례해 

커진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현실에선 역인 경우가 더 많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여건 등이 좋아질 때 생각의 크기, 상상의 크기도 비례해서 커진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젊은 창작자들에게 꿈의 크기를 강조하는 것보다, 

그들이 생각의 크기도 키울 수 있을 만한 현실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정책적으로 필요하다.

 

 

철저한 공정에 있어 서로의 비판, 중간 단계에서의 반려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고정값이다.

까다로운 게 서로 기분 좋기란 어려운 일이다. 일하러 모인다는 건 그런 거다.

덜 기분 나쁘게 윤활유를 더하며 일을 할 수는 있겠지만 

갈등과 까다로움 자체를 피하는 건 일을 제대로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전제 조건을 이해하면 오히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일 수 있다.

어떤 작업을 소위 "날려야"하는 순간에서도 마찬가지다.

 

 

굳이 동시대적인 이슈를 테마로 잡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자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창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서사와 디테일이 얄팍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완전한 픽션이라 해도 지금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세상에 관한 관심을 놓아선 안 된다.

 

 

창작과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에선 대부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경우가 대다수다.

예전엔 사람들이 웃었던 게 지금은 혐오 코드로 분류될 수 있고 

과거엔 당사자들에게도 공감을 샀던 코드가 역시 차별과 배제의 코드로 분류될 수 있다.

작가 개인의 주관적 양심선언보다 중요한 건 

독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관점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때도 경계해야 하는 건 그렇게 검토되고 재구성된 자신의 관점에 확신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 창작하거나 글을 쓰는 모든 인간에게 관심이야말로 가장 큰 동기라고 생각한다.

향상심과 관심받고 싶은 욕망은 불가분 관계다. 문제는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다.

더 나아져서 남에게도 그걸 인정받고 싶다는 것과 그냥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건 다르다.

남에게 사랑받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타인의 평가에 의탁할 때, 

내가 무엇으로 인정받고 싶었는지를 잊게 된다.

 

 

작품을 연재하기 위해서는 세 번의 컨펌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작가 스스로의 컨펌, 그래야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 있다.

두 번째는 작가가 신뢰하는 지인들의 컨펌, 그래야 힘을 얻어 웹툰 편집자에게 보여 줄 수 있다.

세 번째가 연재처에서의 편집 회의를 통한 컨펌.

 

 

만화가들은 더욱 높은 퀄리티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더 좋은 퀄리티를 위해 노력하다 보면 스스로에 대한 확신, 내가 나아갈 길이 보인다.

 

 

- 책 본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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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중문화 기자인 위근우라는 분이 다섯 분의 만화가, 

그리고 애니메이션 감독 한 분과 인터뷰한 것들을 묶어 출간한 책이다.

 

인터뷰에 응한 만화가분들은

 

"어쿠스틱 라이프"를 그린 "난다."

 

"닥터 프로스트"의 "이종범."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

 

"유미의 세포들"의 "이동건."

 

"미생"의 "윤태호."

 

만화가는 이렇게 총 다섯 분이며, 한 분은 "생각보다 맑은" 등의 

애니메이션을 제작, 감독했던 "한지원"이라는 분이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만화, 웹툰,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과 철학, 

그리고 자기 일과 삶 등의 여러 이야기를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부제가 "작가의 이야기는 어떻게 독자를 사로잡는가?"인데 

부제만 봐서는 전문 만화 작법서 느낌도 나지만 

작법서라기보다는 만화가(웹툰 작가)를 꿈꾸는 분들에게 

선배 만화가분들이 건네는 충고 또는 조언집(?)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전반적으로 진지하면서도 약간은 딱딱한(?) 기분이 들었던 내용이었지만 

만화가 지망생분들에게 피와 살이 되는 유익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화가(웹툰 작가)를 꿈꾸시는 분들은 한 번쯤 읽어보시길 권장한다.

 

윤태호 작가님의 작품 말고는 다른 분들의 작품은 아예 본 적이 없거나,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지라 작가분들의 작품을 먼저 본 후 책을 읽어 보았다면 

책에 대한 느낌이나 소감이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될 수 있으면 작가분들의 작품도 함께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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