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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축적된 문화의 관례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 활동이다.

이런 점 때문에 예술은 노년과 연결된다.

노년은 저마다 이어온 관례와 쌓아온 경험이 마침내 답을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젊은 예술가는 참람하게도 영원과 보편과 명료함을 추구하지만, 

노년의 예술가는 혼란과 불명료함을 긍정하고, 삶과 예술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슬픔은 때로 구체적인 형상보다 뚜렷이 않은 형상을 통해 사무치게 드러난다.

 

 

예술가는 좋은 도구와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량이다.

도구와 재료는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다시 구하거나 다른 걸 써도 된다.

하지만 예술가가 오로지 분투하면서 쌓아 올린 기량은 결코 대신할 수 없다.

 

 

말년의 작업은 그 예술가가 세상과 맺어온 관계를 

어떤 의미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스스로가 지나온 길에 만족스러워하면 밝은 작품이, 불만스러워하면 어두운 작품이 나온다.

 

 

예술가는 자신이 앞서 만들어놓은 것의 불완전하고 미숙한 부분을 견디기 힘들다.

할 수만 있다면 끝없이 다시 만들 것이다. 시간이 없다 싶고 기력이 달린다.

이제 놓아줘야 하나? 아니, 그건 싫다.

그런데 시간도 없고 힘도 없다. 나이 든 예술가는 갈팡질팡한다.

 

 

매일 일할 수 있고 앞으로도 일할 수 있다는 건 일하는 사람에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예술가도 일하는 사람이다.

연작이라고 설정해놓으면 새로운 주제를 못 찾아 그림을 못 그리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연작은 결국 예술가의 일이 끝이 없음을 선포하는, 교묘하면서도 결정적인 한 가지 방식이다.

예술가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테니까.

존재 이유를 잃지 않을 테니까.

 

 

적잖은 예술가들은 스스로가 어딘지 진실하지 못하며 

주변 사람들과 세상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말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네 작업에는 진정성이 없어."가 가장 아프다.

 

 

예술가는 명성의 노예가 되고 대중은 예술가를 노예로 부린다. 광대처럼.

다음 단계에서 예술가는 색다른 뭔가를 꺼내 보여서 

대중을 놀라게 할 수도 있지만, 순식간에 외면당할 수도 있다. 두렵다.

 

 

예술가는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게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완성될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관객보다 나을 게 없다.

관객에게 앞날을 예견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예술가도 앞날의 자신, 앞날의 예술을 예견하지 못한다.

이런 난점을 피카소는 멋들어지게 무마했다.

"내가 만약 그 그림이 어떻게 끝날지 안다면 그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

 

 

바깥에서 뭐라든, 예술가 내부의 필연적인 흐름은 

종종 바깥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국면, 탈선, 새로운 시도를 요구한다.

노년의 예술가에게 평화와 안정은 오지 않는다.

예술가는 언제나 새로운 싸움과 탐색을 준비해야 한다.

 

 

고통을 견디면서도 끝없이 일했으니까 이들이 위대한 예술가라고 할 수도 있다.

또 돈도 많이 벌었고 존경도 받고 있으니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이들이 쉬거나 놀 수 있는데도 

일해서 위대하거나 한 게 아니고, 애초에 쉴 수 없고 놀 수도 없었다.

육체의 쇠락과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술가는 아예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는 어떻게든 작업을 이어가려 한다.

 

 

예술은 처음에는 끌어당기지만, 나중에는 사로잡는다.

나이가 들 때까지 자신의 세계를 지키며 버틴 예술가는 포로가 된다.

예술은 옛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계약을 맺은 악마처럼, 영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요구한다.

대신에 예술은 노년을 풍성하게 만든다.

노년은 예술을 통해 스스로와 화해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평온과 만족을 구한다.

노년의 예술가에게 예술은 존재 이유 그 자체다.

 

 

- 책 본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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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재 미술책 저술과 번역을 병행하며 미술사를 다각도에서 

조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미술사가(美術史家) 이연식 님이 쓴 서양 미술사 책이다.

 

미술사 책이지만 전반적인 미술의 역사를 담은 그런 책이 아니라 

저자가 뽑은 10명의 서양 화가들의 일대기를 통해 그들이 젊었을 때 그렸던 작품들과 

노년에 그린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젊었을 때 그렸던 화풍과 

노년에 그렸던 화풍이 왜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책에 소개된 10명의 화가는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터너, 

드가, 모네, 르누아르, 칸딘스키, 폴록, 로스코, 뒤샹이며 

위 10명 외에 추가로 작게나마 보티첼리, 제임스 티소, 

오딜롱 르동,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마티스, 피카소의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다.

위에 인물들을 보면 알겠지만 동양 화가들은 없고 전부 서양 화가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나이 든 화가들의 이야기에 호기심에 생겨서 읽게 된 책으로 

순수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알고 있는 화가들이 몇 명밖에 없었고, 

또 그나마 알고 있는 화가들 또한 그들의 일대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았기에 읽으면서 

조금 답답하지 않을까 우려되었으나, 우려와는 달리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노년의 삶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책에 소개된 화가들은 말년을 편하게 보낸 후 돌아가신 분들보다 

병이나 가난, 자살 등 힘겹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더 많았다.;;;

 

평소에 미술에 관심이 전혀 없거나, 미술, 예술과 관련된 정보들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다면 

책을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낄 수 있으므로 그러한 분들보다는 미술, 예술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신 분들에게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특히 현재 미술에 관련된 직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라면 

역사 속 선배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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