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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에는 대략 100여 명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있고, 

그에 필적하는 80여 명의 카피라이터가 있으며 50여 명의 미디어 프로듀서가 있다.

작년에는 한 달 평균 6~7명가량의 미국 전역에서 몰려드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비슷한 숫자의 프로그래머들을 인터뷰했고, 홈페이지와 블로그, 

메신저를 통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디자인에 관해 제법 길게 얘기했다.

 

이 정도면 비록 미국과 한국으로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넓은 지역과 다양한 배경의 실무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꽤 자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두 해 동안, 많은 사람과의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내보내는 동안 나에게는 한 가지 선입견이 자리 잡았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완고하다.

 

어떤 커다란 현상을 이런 식으로 "규정"지어버리면 말이 당연히 안 된다.

그래서 이건 어디까지나 선입견이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언젠가는(아마도 곧) 다른 생각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맘속에 잠시 자리 잡은 저 선입견을 끄집어내어 

따뜻한 바위 위에 얹어놓고 햇빛과 바람을 쐬게 하면서 

잠깐 자세히 들여다본다고 해서 뭔가 나쁘게 뒤바뀔 일은 전혀 없을 것 같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의 저자이자 Design Observer의 

공동 설립자인 Michael Bierut는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애매하고, 직관적이고, 창조적인" 직업이라고 비꼬아 표현한다.

 

맞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는 근거는 순수예술과 비교해서 나오는 발상일 뿐이다.

내가 같이 일하는 사람 중 인터렉션 디자인을 하는 Matt Walsh라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웹사이트나 혹은 어떤 다중 구조의 인터랙티브 매체의 뼈대를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일에 관계된 모든 것에 논리적인 이유와 통계와 자료를 가지고 있다.

어떤 버튼을 오른쪽에 배치해야 이유는 

웹사이트들의 80% 이상이 그런 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며, 

세로 크기가 600픽셀을 넘으면 안 되는 이유는 

컴퓨터 사용자의 70%가 아직 800x600 모니터를 쓰고 있기 때문이고, 

웹캠을 이용한 인터렉션을 아직 대중적으로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개인 컴퓨터를 가진 이의 3.7 퍼센트만이 웹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대충 이런 식이다.

 

반면 나와 나의 보스의 대화는 상당히 가관이다.

"이거 괜찮아 보여?"라고 보스가 묻는다.

"괜찮긴 한데 좀 더 대비되면 좋겠네." "빨간색은 너무 강하지?" 

"맞아, 좀 더 채도를 낮추자." 이런 대화에서 어떤 논리와 객관성을 내세울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논리의 결핍은 논리의 필요성을 불러들인다.

나는 일을 하면서 작가나 프로듀서들로부터 많은 경우 설명하기를 요구받는다.

대학원에서도 교수들은 언제나 "왜"라는 질문에 내가 대답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설명하지 못한다면 반대로 안다고 할 수도 없고, 

잘 모른다고 여겨지는 전문가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트디렉터로서 프로덕션이라는 배의 선장이다.

배가 떠나기 전까지는 디자이너로서 역할을 다하지만, 

프로덕션의 배를 타면 나는 사람들을 지시해야 하는 역할을 짊어진다.

 

"배를 좌로 26도 선회하라"

 

그런데 이놈의 빌어먹을 배에 탄 선원들은 말을 잘 듣는 인부들이 아니다.

 

"왜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죠?" "왜 하필 26도입니까?" 

"25도면 안 돼요?" "오늘 쉬고 내일 하죠."

 

디렉터는 이런 모든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려줘야 한다.

 

"지도를 보면 왼쪽으로 가야 육지가 나온다." 

"여기서는 1도가 작지만 수백 킬로미터 후에는 엄청난 차이가 된다." 

"오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내일 우리는 태풍을 만난다."

 

자신이 하는 모든 결정에 타당한 이유가 있는 디자이너는

(비록 그것이 직관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아마 선원들이 이해할 만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디자이너는 "애매하고 직관적이고 창조적"이고 

디자인이라는 행위도 다소간 그러하다.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정말 멋진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우리 회사를 방문한다. 빈말이 아니다.

정말 눈이 돌아갈 만큼 뛰어난 작품들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작품 감상으로 쉽게 끝내지 않는다.

언제나 "이것을 왜 하신 겁니까?"라고 물어본다.

인터뷰를 온 사람들은 내가 디자이너란 것을 알고 있고, 

또 나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아싸!) 구체적이고, 애매하지 않은 설명을 시도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게 잘되지 않아 보인다.

맹세컨대, 나는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다.

하지만 자신 있는 미소와 어투로 악수하고 

작품을 소개하던 디자이너들이 "왜"라는 질문에는 스스로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 있게 이런 식으로 얘기하기도 한다.

"이 밴드는 정말 쿨하거든. 그래서 쿨한 폰트를 썼어.

빈티지 스타일이 쿨하잖아." 가뭄에 콩 나듯이 "옳다구나."라는 표정으로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줄기차게(혹은 간단하게) 설명해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일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다.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직관적이면서 

단순한 이유에 기인해서 크고 작은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는 게 더 세련돼 보인다."

 

"이 사진보다는 저 사진이 더 안정돼 보인다."

 

당연히 이런 결정들에 잘못된 것은 없다.

창의적이기 (creative) 위해서 직관적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8포인트 크기의 글자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70%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웃기다.

(앞에서 언급한 Matt이라는 아이는 정말 그렇게 얘기할지도!)

그런 통계와 자료가 통한다면 누군가가 이미 국제 그래픽 디자인 

표준 규격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오로지 창조성과 직관에만 의존하는 작업은 디자이너를 완고하게 만든다.

결정에 대한 충분한 바탕이 없을 때 디자이너는 완고해진다.

판단의 이유가 구체적이지 않고, 마치 "이 정도가 좋아."라는 것처럼 

단순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뒤엎기가 쉽지 않다.

내가 디자이너로서 결정한 것을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 바꾸는 게 

디자이너의 주관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져 

나의 자존심과 전문가적인 실력에 상처를 주게 된다면 그건 정말 곤란하지 않겠는가.

창살은 언제든 교체할 수 있지만, 대들보는 쉽게 바꿀 수 없다.

내가 의지하고 있던 그 어떤 애매하고 직관적이고 

창조적인 어떤 한 가지가 비전문가에 의해 부정되는 순간, 

"네가 디자인에 대해 뭘 안다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이 정도면 확실히 완고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나는 가끔 클라이언트의 역할도 한다.

회사끼리 협력을 할 때 때로는 나의 회사가 

더 높은 위치에서 지시하는(아싸!) 운 좋은 경우도 생긴다.

전화기 저편에 있는 디자이너는 내가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모를 때가 많다.

뭔가를 지시할 때 가끔 분명하게 그 사람들 마음속 분노의 소리를 들릴 때가 있다.

 

"네가 디자인에 대해 뭘 안다고..."

 

논리가 갖춰지지 않음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완고 해지는 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완고해지기 시작하면 

잘못된 결정을 밀어붙이려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완고한 디자이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두 가지 중 하나로 결판난다.

나 몰라라 하게 되든가, 일을 그만두던가.

어떤 경우이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해서 디자인에 대해 언제나 바른 판단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완고해지지 않으려는 나의 요령을 소개한다. 간단하다.

마음속으로 "누가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지?"라고 

자문하고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어떤 결정을 하면서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여러 가지 생각을 밑바탕에 깔자는 게 취지다.

이것은 대단한 큰 결정에도 그리고 아주 조그만 사소한 문제에도 적용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질문: 누가 이 글자를 왜 이렇게 작게 했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1. 윗줄보다 덜 중요한 정보이고, 2. 이 정도면 읽힐 수 있고, 

3. 대비를 크게 줘서 제목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이 모든 생각을 일일이 다 검증할 수는 없지만, 

내 안에서 디자인을 떠받치는 다중의 요소들로 삼을 수는 있다.

만약 이런 요소 중 하나가 누군가에 의해 이것이 흔들리더라도, 

클라이언트가 "작아서 안 읽히는데요."라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생각했던 이유를 설명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어 의견을 듣는다. 내가 틀렸다면 고치면 된다.

2번 생각을 바꾸고 1, 3번을 유지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다시 손본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타이포그래피의 전문가인 디자이너가 결정한 크기인데 왜 토를 다나."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훌륭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세상에는 지금 얘기한 경우와는 다른 3백만 가지 다른 경우가 디자이너를 덮친다.

저런 요령을 소개하긴 했지만, 정말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경우 

나 역시 완고하게 물러서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

한 번은 프로그래머와 부딪혔는데, 

"내가 지금 당신에게 타이포그래피 강의를 해야 합니까?"라고 밀어붙였고, 

다른 한 번은 보스와 붙었는데 "나에게 여기에 글자를 세로로 쓰게 하려면 

차라리 나를 해고하시오."라고 해서 내 뜻대로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순간은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하고, 혹은, 생각해보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결과적으로는 더 나아지는 경우가 더 많다.

유연 해지는 것이 곧 자존심을 굽히고 불의를 눈감는 것이 아니다.

프로젝트에 대해 많이 알고 진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완고한 마음은 더 작아진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그래픽 디자인을 평가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평가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반영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몫이다.

 

 

 

[출처]

www.designerschool.net/readings/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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