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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하나의 동물로 보았을 때, 

우리 인류는 참으로 한심한 존재이면서, 더없이 경이로운 생명체다.

몸에 어떠한 자기방어 수단도 갖고 있지 못한 

이 털 없는 원숭이는 물 한 방울 또는 바람 한줄기로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허약한 존재지만, 그런데도 이 원숭이는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주의 지배마저 꿈꾸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지구에는 193종의 원숭이와 유인원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192종은 온몸이 털로 덮여 있고, 단 한 가지 별종이 있으니, 

이른바 "호모 사피엔스"라고 자처하는 털 없는 원숭이가 그것이다.

지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대성공을 거둔 이 별종은 

더욱 고상한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기본적인 욕구를 무시하는 데에도 똑같은 양의 시간을 소비한다.

그는 모든 영장류 중에서 가장 큰 두뇌를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두뇌만이 아니라 성기도 가장 크다는 사실은 애써 감추면서 

이 영광을 힘센 고릴라에게 떠넘기려고 한다.

그는 무척 말이 많고 탐구적이며 번식력이 왕성한 원숭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원숭이의 기본 행동을 검토해야 할 적기다.

 

 

많은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생물학적 기원에 놀랄 만큼 충실하다.

우리의 유전적 프로그램은 유연한 융통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래도 중요한 변화에는 저항한다.

솔직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경우에는 

창의성을 발휘하여 우리를 도와줄 대용품을 고안해낸다.

우리가 과학 기술의 편리함과 현대 생활의 흥분을 즐기면서 

동시에 원시적인 명령에도 복종할 수 있는 것은 인류라는 종이 가진 창의력 덕분이다.

 

 

인간의 이와 손, 눈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해부학적 특징으로 미루어보아, 

인간이 일종의 영장류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주 기묘한 영장류이다.

192종의 원숭이와 유인원의 가죽을 한 줄로 길게 늘어놓고 

인간의 피부를 어딘가 적당한 위치에 끼워 넣으려고 해 보면, 

인간이 얼마나 괴상한 영장류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중략) 피부가 사실상 털이 없는 벌거숭이라는 점이다.

머리와 겨드랑이와 생식기 주변에 눈길을 끄는 이채로운 털이 

나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의 피부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다른 영장류와 비교하면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일부 원숭이와 유인원은 엉덩이나 얼굴이나 가슴에 

조그맣게 노출된 피부를 갖고 있지만,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192종 가운데 어떤 것도 인간의 조건에는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더는 조사할 필요도 없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새로운 종을 "털 없는 원숭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

"털 없는 원숭이"는 단순한 관찰에 바탕을 둔 단순하고 

묘사적인 호칭이며 주제넘은 가정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털 없는 원숭이"라고 부르면, 우리가 균형 감각과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 발전은 우리에게 과학 기술의 대단한 진보를 가져다주었지만,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생물학적 자질과 충동할 때는 항상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곤 했다.

우리가 사냥하는 원숭이 시절에 이미 내버린 근본적인 행동 양식들은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어, 

아무리 고상한 일이라 해도 잘 살펴보면 그 밑바닥에는 영장류의 행동 양식이 깔려 있다.

우리의 세속적 행위들, 그러니까 먹고 싸우고 짝짓고 새끼를 기르고 하는 

행위들의 조직화가 오로지 문화적 수단을 통해서만 이뤄졌다면, 

지금쯤은 그것을 좀 더 잘 통제할 수 있어야 할 테고, 

과학 기술의 진보가 제시하는 별난 요구 상황에 맞추어 

이쪽이나 저쪽으로 자유롭게 바꾸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동물적 본성에 계속 굴복해 왔고, 

우리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복합적인 짐승의 존재를 암암리에 인정해 왔다.

그것을 바꾸려면 수백만 년의 세월과 또 그만큼의 자연도태라는 

유전학적 과정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게 솔직한 태도다.

 

 

나는 동물학자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관점에서 성적 "변태"를 논할 수는 없다.

나는 다만 개체군의 성공과 실패라는 관점에서 생물학적 도덕률을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성적 행동 양식이 번식을 방해한다면 

그런 행동 양식은 생물학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수도승, 수녀, 노처녀와 노총각, 그리고 동성연애자 같은 집단은 모두 번식이라는 의미에서는 변종이다.

사회는 그들을 낳아서 길러주었는데, 그들은 거기에 보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번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수도승이 변종이 아니듯 

적극적인 동성연애자도 변종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혐오스럽고 반도덕적으로 보이는 성행위라 할지라고, 

그것이 전체 집단의 번식을 방해하지 않는 한 생물학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아무리 변태적인 성행위라도 그것이 부부 사이에서 생식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고 

한 쌍의 남녀 관계를 강화해 준다면, 번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제 몫을 다한 것이고,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가장 "타당하고" 사회의 승인을 받은 성적 관습과 마찬가지로 용납할 수 있다.

 

 

인구 과잉 문제를 염두에 두면 출산율을 극적으로 줄여야 할 필요성은 분명해지고, 

따라서 수도승과 수녀, 노처녀와 노총각, 그리고 동성연애자처럼 자녀를 낳지 않는 집단을 

생물학적으로 비판할 까닭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순전히 번식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이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이 주장은 그들이 특수한 소수파의 입장에서 직면해야 하는 

그밖에 사회적 문제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번식만 하지 않을 뿐 그 밖의 점에서는 

사회에 잘 적응하고 또 우리 사회의 귀중한 일원으로 활동한다면, 

그들은 이제 인구 폭발에 기여하지 않는 유익한 사회 구성원으로 여겨져야 한다.

 

 

모든 사회적 접촉은 아무리 우호적인 상황에서도 가벼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만나는 순간 상대편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미소와 웃음은 둘 다 이런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두려움이 매력이나 승인 같은 감정과 결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웃음이 강도 높게 발전하면, 그것은 언제든지 "너를 더욱 놀라게 해 주겠다."는 신호, 

즉 위험과 안전이 공존하는 상황을 더욱 철저히 이용하겠다는 신호가 된다.

반면에 강도가 낮은 웃음인 미소가 활짝 웃는 표정으로 발전하면, 

그것은 상황이 그런 식으로 확대되지는 않을 거라는 신호다.

그런 표정은 최초의 기분이 어떤 강렬한 감정도 합성해내지 않고 끝났다는 것을 나타낸다.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짓는 것은 그들이 둘 다 약간 불안을 느끼고 있지만, 

동시에 매력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확인시켜 준다.

약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공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공격적이 아니라는 것은 우호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미소는 이런 식으로 상대편을 끌어당기는 우호적인 장치로 발전한다.

 

 

어머니가 긴장하여 불안한 몸짓을 하고 있으면, 

아무리 숨기려고 애써도 아기에게 그 기분을 전달하게 된다.

그럴 때 어머니가 아무리 활짝 미소를 지어도 아기를 속일 수는 없다.

오히려 아기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아기에게 영구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기는 나중에 사회에서 타인과 접촉하고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하는 일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부모를 모방하여 배운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행동이 추상적이고 고상한 도덕률의 원칙과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한 행동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모방하면서 우리 몸에 깊이 배어든, 

그리고 오래전에 "잊혀진" 인상에 복종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가 관습과 "믿음"을 바꾸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조심스럽게 감추고 있는 본능적인 충동과 아울러) 

이런 인상에 무조건 복종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객관적인 지성에 바탕을 둔 자극적이고 합리적인 

새로운 생각에 부닥쳐도, 사회는 여전히 옛날의 습관과 편견을 고수할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조상들의 축적된 경험을 단숨에 흡수하는 중요한 

"압지(壓紙)" 단계를 거치는 한, 이것은 우리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다.

우리는 조상들이 발견한 귀중한 것들과 더불어 조상들의 편견도 함께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어린 원숭이 새끼는 모두 호기심이 왕성하지만, 

자라날수록 그 호기심은 차츰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어린 시절의 호기심을 간직하고, 

때로는 호기심이 더욱 강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결코 조사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만 알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질문에 대답하면, 그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가장 위대한 생존 기술이 되었다.

 

 

예술가든 과학자든 탐험을 할 때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충동(네오필리아)과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충동(네오포비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새것을 좋아하는 충동은 우리를 새로운 경험으로 내몰고, 우리는 새로움을 갈망한다.

새것을 싫어하는 충동은 우리를 억제하고, 우리는 낯익은 것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우리를 흥분시키는 새로운 자극과 우호적인 낯익은 자극이 우리를 양쪽에서 끌어당긴다.

우리는 그사이에 끼여서 끊임없이 이쪽저쪽으로 오락가락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새것을 좋아하는 충동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더는 발전하지 못하고 침체할 것이다.

새것을 싫어하는 충동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곧장 재난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이런 갈등상태는 머리 모양과 옷, 가구와 자동차의 유행이 끊임없이 바뀌는 이유를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적 진보의 토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탐험을 후퇴하고, 조사하고 안주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복잡한 환경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조금씩 넓혀간다.

 

 

과보호를 받은 어린이는 어른이 되었을 때 반드시 사회적 접촉에 고통을 받는다.

이것은 외동아이일 경우에 특히 심각하다.

형제자매가 없으면 초기에 대단히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같은 또래의 놀이 집단과 어울려 거칠게 뒹굴고 노는 것은 

외동아이를 사회생활에 적응시키는 효과를 나타내지만, 

이런 사회화 과정을 경험하지 않은 외동아이는 

평생 수줍어하고 소극적이며 성생활이 어렵거나 불가능해지기 쉽다.

그리고 어떻게든 부모가 된다 해도 아주 나쁜 부모가 될 것이다.

 

 

인구가 오늘날처럼 무서운 속도로 계속 늘어나면 통제할 수 없는 

공격 행위가 극적으로 늘어나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실험으로 분명히 입증되었다.

인구가 지나치게 과밀한 상태는 사회적 긴장과 정신적 압박을 초래함으로써, 

우리를 굶어 죽게 하기 전에 우리의 공동체 조직부터 먼저 무너뜨릴 것이다.

과밀 상태는 지적 통제력이 강화되는 것을 직접 방해하고, 감정이 폭발할 가능성을 크게 높여준다.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피임이나 낙태를 널리 보급하는 방법이다.

다만 낙태는 너무 과격한 수단이어서 감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일단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형성되면 

그것은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을 이룬 셈이므로,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사실상 우리가 억제하려고 

애쓰는 행위와 똑같은 유형을 가진 공격 행위다.

따라서 피임이 더 바람직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피임에 반대하는 종교적 또는 도덕적 파벌은 자신들이 전쟁을 

조장하는 위험한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종교는 결코 다루기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는 동물학자이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행동과학적인 의미에서 종교 활동은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지배적인 존재를 달래기 위해 오랫동안 복종의 몸짓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얼핏 보기에는 종교가 그토록 성공한 것은 놀랍게 여겨지지만, 

종교가 가진 막강한 영향력은 전능하고 지배적인 집단 우두머리에게 

복종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성향, 원숭이나 유인원 조상들에게서 

직접 물려받은 생물학적 성향의 힘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때문에 종교는 사회의 응집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우리의 먼 조상들이 놓여 있던 

독특한 상황을 고려해볼 때 종교가 없었다면 

우리 인류가 과연 이만큼 진보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종교는 감동을 주어야 하고, 또 감동을 주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우리 공동체의 본질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집단적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거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허례허식"을 제거하면 심각한 문화적 공백이 생길 테고, 

종교적 가르침은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낭비적이고 터무니없는 신앙은 공동체의 

질적 발전을 저해하는 경직된 행동 양식으로 우리를 몰아넣을 수 있다.

 

 

문에 문패를 달거나 벽에 그림을 거는 것은, 

개나 늑대의 관점에서 보면, 문이나 벽에다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어 자기 냄새를 남겨놓는 거나 마찬가지다.

어떤 특정한 종류의 물건을 열심히 "수집"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비정상적으로 강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약 100년 전만 해도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는 

"사냥감"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이 인기 있는 오락으로 공연되었다.

그 후 이런 종류의 폭력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유혈 사태에 대한 

감수성을 무디게 할 가능성이 크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인구 과밀 때문에 영역과 지배력에 대한 제약이 거의 참을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억눌린 욕구가 야만적인 공격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많은 우리의 복잡한 사회에서는 

그런 종류의 폭력이 잠재적인 위험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얼굴은 평평한 모양을 갖고 있으므로, 

선택 교배를 이용하여 개의 코 부위에 있는 뼈를 줄였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품종의 개들이 비정상적으로 평평한 얼굴을 갖고 있다.

동물을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고 싶은 우리의 욕망은 너무 강력해서 

때로는 동물의 이빨을 희생해서라도 이 욕망을 만족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이 같은 접근 방식은 순전히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동물을 동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 거울이 지나치게 일그러져 있으면 우리는 거울을 

구부려서라도 우리에게 편리한 모양으로 바꾸려고 애쓴다.

 

 

우리가 생존에 실패한 동물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데에는 정당한 과학적, 심미적 이유가 있다.

우리가 동물 세계의 풍부한 다양성을 계속 누리고 야생 동물을 과학적, 

심미적 탐구 대상으로 계속 이용하려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한다.

그들이 사라지게 내버려 두면, 우리의 환경은 단조로워지고 삭막해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열심히 조사하고 연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귀중한 자료를 잃어버리면 살아갈 수 없다.

 

 

인구가 지금처럼 놀라운 속도로 계속 늘어난다면, 

결국, 우리와 야생 동물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야생 동물이 우리에게 상징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또는 심미적으로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경제적으로는 야생 동물에게 불리한 쪽으로 상황이 바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밀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다른 동물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전혀 남지 않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인간의 거주 공간에 대한 요구가 계속 늘어나면, 

결국에는 훨씬 더 과감한 조처를 할 수밖에 없고, 

마침내는 식물성 음식으로 식료품을 통일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다른 행성에 대규모 식민지를 건설하여 부담을 분산하거나 

인구 증가를 어떤 식으로든 억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지구에서 다른 모든 생명체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여전히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웅대한 사상과 오만한 자부심이 있지만, 

그래도 역시 동물의 기본적 행동 법칙에 모두 순응하는 보잘것없는 동물이다.

 

 

우리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으며,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통계를 초월해 있다는 기묘한 자기만족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흥미로운 동물들이 과거에 수없이 멸종했듯이,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조만간 우리는 사라질 테고, 다른 동물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우리는 자신을 생물학적 표본으로 

철저히 인식하고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내가 인간이라는 명칭 대신 털 없는 원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우리를 일부러 모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명칭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우리 생활의 껍데기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강요한다.

나는 인간을 높이 찬양할 수도 있었고, 눈부신 업적을 묘사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정말 비범한 동물이다.

나는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찬사는 너무나 자주 되풀이되었다.

동전을 던졌을 때 항상 앞면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동전을 뒤집어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너무 강력하고 성공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비천한 기원을 생각하면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꼭대기까지 올라간 것은 한순간에 일확천금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벼락부자"들이 대게 그렇듯이 우리는 우리의 내력에 배우 민감하다.

게다가 우리는 그 내력이 언제 폭로될지 몰라 끊임없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는 양이 아니라 질을 향상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진화론적 유산을 부인하지 않고도, 

극적으로 흥미진진하게 과학 기술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억눌린 생물학적 충동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둑이 터지고, 

그동안 갈고 다듬어온 우리의 존재 전체가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류가 동물로 전락하는 

낭패감을 느끼게 될 것 같지만, 실은 그 반대다.

오히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났을 때, 존경과 감탄으로써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이가 자라면서 말을 배우고 두 발로 서고 

마침내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일어서는 것을 목격할 때 느끼는 경이와도 비슷하다.

인류가 진화해온 역사는 그처럼 감동적이다.

우리 자신은 지금 여기에 이토록 안락하게 앉아 있지만, 

우리의 조상 원숭이들은 얼마나 힘겨운 고난과 

눈물겨운 노력을 거치면서 그들의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준 것일까.

그렇기에 이 책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로 읽히기도 한다.

 

 

- 책 본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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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국에서 태어난 데즈먼드 모리스라는 동물학자이자 생태학자가 쓴 책으로서 

인간을 여러 동물 중 하나의 "종"으로 보고 

일반적인 동물학 연구서처럼 인간을 동물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인간의 기원과 인간의 섹스, 기르기, 모험심, 싸움, 먹기, 몸 손질, 

다른 동물과의 관계 등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을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저자 특유의 시선을 담아 저술하였다.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67년이었는데 당시의 시대 상황상 

내용이 워낙 파격적이었던지라 출간 당시 판매 금지를 당하고 

특정 종교단체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1991년 처음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이후 2001년, 

2006년, 2011년에 세 차례에 걸쳐 재출간되었다.

내가 읽은 것은 2001년 출간된 버전으로 책을 구매한 지는 

10년이 훨씬 넘었으나 완독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10년 넘게 책장에 그냥 꽂혀있다가 안 읽는 책들을 정리할 겸 해서 이번에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게 올해 처음 읽은 책이기도 하다.;;;

 

인간을 "개" 나 "고양이"같은 동물들처럼 분석해서 쓴 책이다 보니 읽고 난 후에는 

인간, 또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이나마 변하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예전보다 좀 더 냉소적이게 보게 되었다.)

평소에 이런 책들을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보니 책 내용 대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웠고 인상 깊었다.

 

특정 종교에 심취해 있는 분이라면 매우 부정적으로 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분이라면 과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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