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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들은 특별히 짧은 머리에, 어깨가 남자보다 넓은 기이한 여자들이 아니다.

(중략) 기이하고 독특해서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인류도 아니다. 머리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어떤 여자는 머리가 허리보다 길게 내려오고,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여자도 있다.

하얗고 뽀얗고 동글동글한데 유연하게 야구 경기를 하는 여자도 있다.

웨이브 펌이 멋들어지게 들어간 분위기 있는 언니도 있다.

날씬하기도 하고 포실포실하기도 하다.

치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바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피부가 까만 사람도 있지만, 자외선 차단제의 힘으로 하얀 사람도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법한 저마다 바쁘고, 사연이 있는 평범한 여자들이다.

아픈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있고, 돈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

현실과 환상, 패배와 승리 사이에서 버둥거리며 노력한다.

그렇다. 이 여자들은 그냥 야구를 좋아하는 여자들이다.

 

 

 

우리의 야구는 후원사가 없다. 후원인도 우리, 선수도 우리다. 돈도 나눠서 낸다.

야구 동호회의 진짜 문제는 "유전무동, 무전무동"이 아닐까?

돈이 있으면 운동을 할 수 있고, 돈이 없으면 운동을 할 수 없다.

개인 운동을 제대로 해보려면 개인의 자본이 많이 필요하다.

특히 운동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성인이 된 이후에 

시작하게 된다면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학원"과 "과외"밖에 없다.

운동을 위해 이렇게 돈을 많이 들여야 하나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중략) 진정한 자유는 황금으로도 살 수 없다지만, 잔디밭에서 운동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살 수 있다.

비록 나는 돈이 없지만 언제든지 잔디밭에서 운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잔디밭을 빌려서 쉽게 놀 수 있다.

골프장도 있고, 야구장도 돈으로 빌리면 되니까.

돈이 없어 잔디밭을 밟으며 운동을 할 수 없는 삶은 슬프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사전에 많은 예습을 요구하는 것 같다.

입문자를 끌어들이는 장벽이 너무 높지 않은가?

어차피 인구도 적은 땅에서 야구를 하는 사람은 더 적을 텐데 문턱이 좀 낮으면 좋겠다.

야구는 마니아를 더 환대하는 폐쇄적인 기질이 있다.

마치 간판도 문도 제대로 안 열리는 히든 바(bar)다.

덕분에 입문이 어렵긴 하지만, 일단 들어오고 나면 마니아들끼리 끈끈한 유대감과 동지애가 생긴다.

"안다"라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더 살뜰하게 챙겨주기도 한다. 일단 들어오는 게 쉽지 않지만.

 

 

 

야구는 축구에 비해선 참으로 개인적이다.

본인이 맡은 개인 업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함께하는 플레이에서도 의미가 있다.

공이 올 때는 철저히 혼자다. 타석이든, 수비든.

타석에서 혼자 투수와 싸운다. 배트를 들고 터벅터벅 돌아온 더그아웃에선 함께다.

수비는 공을 잡기 직전까지 혼자였다가 공을 잡는 순간부터 함께 움직여야 한다.

함께하지 않으면 경기가 끝나지 않는다.

모든 개인의 활동이 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풀어내야 이길 수 있다.

고로 야구는 개인 간 거리가 보장되는 합리적인 팀 운동이다.

 

 

 

사회에서는 가볍게 거리감을 둔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프지 않도록.

누군가가 나를 실망하게 하더라도 덜 아프게 말이다. 야구에서는 그 거리감을 잠시 잊게 된다.

그래서 서로에게 실망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질투하기도 한다.

이상하게 야구를 하다 보면 이 거리감을 잊게 된다.

이 부대낌이 힘들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익숙하다. 힘든 부대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인데 때때로 가까운 형제 같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크게 싸우기도 한다. 싸울 수 있기에 오히려 가까워지기도 한다.

사람과의 질척임이 야구의 매력이다.

 

 

 

전국대회에 참가한 모든 비용은 거의 8할이 "내돈내산"이다.

팀에서 전국대회가 오기 위해 사용한 기본비용도 있고, 전국대회 참가비도 있을 것이며, 

숙박비, 식사비 등 "대회에 참가한다"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팀 단위로 비용이 드는 일이다.

"내가 여기들인 비용(시간과 돈)이 얼마인데 본전을 뽑아야지"라는 마음이 들면 서로에게도 날카로워진다.

일반 리그에서는 그냥 넘어갈 법한 실수도 전국대회에선 넘길 수가 없다.

더군다나 중요한 국면에서 공을 떨어뜨리면 아주 죄인이다.

그 순간 모두의 한숨 소리가 귀에 꽂힌다. 그리고 잊히지 않는다.

벤치에 돌아오면 다들 (허탈한 표정으로) 괜찮다고들 한다.

이 정도면 부드러운 편이다. 서로 성질을 내기도 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한다.

벤치가 숨이 막히는 순간이 온다.

 

 

 

사회인 야구 수준에서 전국대회에서의 에러(실수)는 프로의 포스트 시즌 중 에러 같은 느낌이다.

그런 에러를 하고 나면, 함부로 댓글로 어떤 특정 선수를 비난하거나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선수가 실수한 후에 더그아웃에 푹 앉는 모습을 보면 보인다.

어깨에 묵직한 아령이 얹어진 그 모습. 그냥 봐도 어떤 기분일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잘하든, 못하든 전국대회는 참가 그 자체로 감정 소모가 큰 것이다.

 

 

 

노골적으로 화를 내거나 침울해하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로들도 그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면 뭐라 할 순 없지만 

그런 말과 태도가 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팀의 전체 분위기를 밝고 긍정적으로 바꾸는 건 "이기는 팀"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몰아세우는 공포정치로는 한계가 있다.

성장을 북돋고, 동기부여를 하고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팀은 계속 성장할 수 있다.

 

 

 

취미는 일보다 중요한가?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단에서 같은 계절을 두어 번 지나는 동안 어려운 순간은 많았다.

지지 말아야 할 팀에게 무참하게 진 다음 날은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한다.

개인적인 생활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왜 굳이 야구팀에 들어가서 단체 생활을 하려고 하는가? 불편한데?

그래도 야구를 시작하는데 "좋다"는 이유 외에 다른 게 별로 필요 없었다.

돈이 많이 든다는 것도, 연습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도,

룰을 이해하는데 책 한 권을 봐야 하는 것도, 나는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일을 시작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반항보다는 순응이 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당한 일에 고개 들어 아니라고 말하는 것보다 함께 부당한 이윤을 취하면 마음도 몸도 편해졌다.

아니라고 말할 때마다 불편해졌고, 그렇다고 말하는 이들은 더 편하게 살아갔다.

내 안에서도 서서히 투쟁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쳐갔다.

정신은 다시 불꽃이 붙지 않을 법한 재가 된 채로 주말을 맞이한다.

재는 무슨! 경기에 들어가자마자 투쟁심이 활활 타오른다.

이기려고 아득바득 노력한다. 이기지 못하는 날도 있지만, 그러다 소소하게 승리하는 날이 생긴다.

삶을 지속하는 데 어느 정도 투쟁심이 필요하다.

야구가 살린 투쟁심은 삶이 다 타버릴 때마다 불쏘시개처럼 다시 나를 타오르게 한다.

 

 

 

누군가 전국대회, 아니 여자야구 해볼 만해요?

물어본다면, 기억의 한 페이지는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쉽지 않다. 힘들고, 아픈 기억도 생길 수 있다.

아무리 기억 속에서 미화되어도, 신났던 기억만 남아도, 사진은 웃고 있어도 분명 힘들었다.

싸우기도 했고, 부딪히기도 한다. 커피를 마시고 나면, 잔 앙금이 커피 아래 가라앉아 있듯이….

그래도 해볼 만하다. 야구가 취미인 우리에게 일상의 괴로움을 

잊을 만한 환상의 공간으로 야구장이 남아주면 좋겠다.

반드시 절실하게 성과를 내야 하는 곳도 아닌 감정을 부딪쳐가며 효율성을 추구하는 곳도 아닌, 

그저 매주 좋아하는 사람들과 야구하고, 뛰어놀고 평화롭게 재밌는 환상의 섬.

져서 화나면 화난 대로 다 같이 맥주를 마셔서 즐겁고, 

이기면 이겨서 신나서 맥주를 마셔서 즐거운.그런 곳으로 야구장이 남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런 환상의 섬이 있다고, 더 많은 이들이 편안하게 야구를 하게 된다면….

언젠가 더 높은 경지의 야구를 하는 언니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 책 본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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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 "김입문"이 여자 사회인 야구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경험담이 담긴 책으로서 

10개 출판사와 카카오 브런치(brunch)가 함께했던 제9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책인데 지금은 중단했지만, 과거 여자야구 선수(포지션은 포수)를 

주인공으로 한 웹툰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소소하게 자료 수집을 하고 스토리도 구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호기심과 함께 정보 수집 겸 이번에 읽어보게 되었다.

 

스포츠 동호회 활동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특히나 여자 야구는 

소소하게 모은 자료 외에는 실제 경기를 관람한 적도 없었기에 모르는 부분이 아주 많았는데 

이 책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유익하게 읽었다.

그리고 유익한 부분 외에도 위트있는 문장이 많아 킥킥거리며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또 야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비교적 디테일하게 서술했기에 실제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또 고뇌에 가득 찬 내용들을 읽었을 때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왜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재밌고 유익한 책이었다.

 

그래도 단점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부분이 종종 있었다는 점과 

야구라는 스포츠를 아예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읽기가 수월하지는 않다는 점.

그리고 책 111p, "동네 리그 첫 경기"에서 저자 본인이 팀에 들어온 지 4주밖에 되지 않아 

선수 등록이 안 되어 경기 대기 인원 명단에서조차 없었다고 서술했는데 

막상 경기에서는 대타로 출전했다고 한 부분이 이해가 안 되었다.

(감독이 상대편에게 이야기를 해놨다고 말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또 344p, 사첼 페이지(Satchel Paige) 선수에 관한 내용에 조금 오류가 있다는 점.

(책에는 사첼 페이지 선수가 "42세 때 야구를 시작해 58세까지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다"라고 서술했는데 

사첼 페이지는 만 19세인 1926년부터 니그로리그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인 만 42세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연금 규정이 개정되어 페이지가 3이닝 차이로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메이저리그를 떠난 지 12년 만에 다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라 3이닝을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었다.

이때 나이가 무려 58세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참 아쉬웠던 부분인데 훌륭한 책 내용과는 다르게 
"책 제목"과 "책 표지 디자인"이 인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충격과 공포의 사회인 여자야구"라는 제목 같은, 임펙트 있는 제목이었으면 더 좋았을 듯.;;;)

 

누구라도 좋으니 이 책을 바탕으로 하여 웹툰 또는 드라마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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