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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찬히 생각해보면 작가 활동을 하기 위해 
꼭 많은 사람의 지지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요.
제가 가진 주제 의식과 실험 정신에 공감하는 출판사 한 곳, 편집자 한 명만 있으면 돼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독자들도 적지만 분명히 있고요.
주류 사회가 성소수자를 포용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정체성을 감추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다수의 지지를 받기 위해 저라는 사람의 고유한 관점과 신념을 버릴 이유가 없어요.
내 편의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법을 배우면 돼요.

 

 

 

무엇보다 저는 예술이 생활보다 숭고하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저는 열심히 일하고 정당히 돈을 벌어 세금 내는 화가라는 직업인이고 싶어요.
세상에는 작은 도장 하나를 파면서도, 요리 한 접시를 내면서도 
그 안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해 아름답게 결과물을 만드는 많은 직업인이 있어요.
미술이나 음악만 예술이 아니에요. 그들이 다 예술가예요.

 

 

 

많은 어른이 현실을 솔직하게 묘사한 책에는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아이들이 진짜 현실에서 만나는 폭력은 방치해요.
가정 폭력, 학교 폭력, 일상생활에서 어른들이 타인을 향해 
내지르는 욕설과 분노, 유튜브에서 보는 적나라한 영상을 걱정해야죠.
저는 초등학생부터는 어떤 책을 봐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청정하고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들려주면 
"흠,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아이가 시시해 해요.
초등학교만 가도 권력 다툼, 서열 매기기, 암투, 견제, 음모 등 
어른 사회랑 별반 다르지 않은 경험을 해요. 아이들은 이미 현실을 잘 알고 있어요.

 

 

 

요즘도 많은 어린이책이 세계를 도식적으로 그려내요.
그림책에 등장하는 동물도 개, 고양이, 곰, 토끼 등 몇 종에 쏠려 있고, 
모두 호감 가는 외양으로 도식화되어 있지요.
도식을 취한다는 건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에너지를 들여가며 대상을 바라보고 새로이 인식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캐릭터화한 표현, 대상화된 표현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현실 인식도 왜곡될 수 있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은 도식을 배반하는 그림이에요.
작가가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본 결과를 그려내는 그림, 
고유한 시선이 전해지는 그림을 아이들이 더 많이 보았으면 해요.

 

 

 

내 일상에서 소재를 찾은 뒤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꿔내는 과정은 절대로 쉽지 않아요.
특히 그림책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른, 
아이 모두 공감하도록 바꿔내야 하기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고민을 많이 해야 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최선의 길을 찾지요.
(중략) 쉽고 편하게 읽히는 책일수록 작가의 고통이 크다고 보면 돼요.

 

 

 

그림책은 회화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어떤 감정을 만들어내요.
연대의 감정일 수도 있고, 분노의 감정일 수도 있어요.
작가의 시선이 편향되어 있으면 살아갈 날이 아주 많은 존재들에게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고요.
그래서 비극 속에서도 분명 존재했던 인간의 선한 의지에 주목하는 거예요.

 

 

 

늘 돌파만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고, 늘 좌절만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거든요.
누구나 때에 따라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해요.
그냥 나에게 찾아온 경우의 수 중 하나로 봐야 해요.
다음에는 다를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성공은 100% 운이에요. 고 신해철 씨가 마지막 강연에서 

"인생의 깊숙한 비밀을 알려줄게. 성공은 운이야."라고 했던 말을 저도 전적으로 동의해요.

그러니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연구하지 마세요.

연구한다고 그 사람 삶이 내 것이 되지 않아요. 그냥 열심히 자기 자신으로 사세요.

또 한 가지 조언이 있어요.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과 

이유 없이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그들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반대하거나 지지할 거예요.

내가 내놓은 결과물을 누군가 탐탁지 않아 하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받아줄 사람도 있으니 저는 괜찮습니다."라고요.

 

 

 

사회가 안전하다고 정해놓은 방식이 진실로 나를 위한 길인지 의심하고 검증하는 경험은 중요해요.
"대기업에 가야 안전하대.", "어떻게든 인서울 해야 한대.", 
"아파트는 하나 있어야지." 같은 세상에 떠도는 말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왜 자기표현이 중요한지 이야기할게요.
표현하지 못한 감정 안에 오래 있다 보면 세상 보는 눈이 왜곡되더라고요.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고요. "네가 힘들어서 죽어 나간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으리"라는 상태가 진짜 아픈 상태예요.
한국 사회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자꾸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내가 막혀있으니까요.
주변과 감응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 감응해야 해요.
자신의 현재를 이해하고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해요.
나를 표현하지 못하면 타인과 연대할 수 없고, 

연대할 수 없으면 열린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내 문제가 되었을 때 외면당할 수 있어요.
하나만 생각하면 좋겠어요.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이 고통의 당사자보다 힘들진 않아요.
해결해주지 못하더라도 관심을 보이고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정말 구원받아요.

 

 

 

인정이 목마른 사람에게 "왜 그렇게 남을 신경 써? 

자기만족이 중요하지."라는 말은 도덕 교과서처럼 들린다.
올바르지만 죽어있는 말이다. 타인의 관심에 완벽히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인정 갈망과 자기 수용의 적정 비율도 없다.

균형점은 결국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만약 매일이 똑같이 느껴진다면 삶에 길들여진 거라고 생각해요.
힘들고 어려웠던 일이 노력 끝에 편안하고 쉬워졌다는 느낌하고는 다르지요.
그건 자기가 알아요.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다고 느껴질 땐 변화해야 해요.
다르게 살게 만드는 건 결국 디테일을 감지하는 예민함 같아요.
갑자기 "영어를 배워야겠어, 직업을 바꿔야겠어." 같은 거창한 다짐보다 
매일 나에게 벌어지는 사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귀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일이에요.
내가 누리는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며 하루하루 조금 더 나아지려는 

자세가 있다면 길들여지지 않은 채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림책은 다음에 올 사람, 아직 미정인 존재를 위한 책이다.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로 스스로를 온전히 설명하거나 변호할 수 없는 사람들, 
권력의 중심부에 서본 적 없는 이들을 향한다.
이들이 겪어나갈 세계는 그리 녹록지 않다. 위계는 촘촘하고, 경쟁은 잔혹하다.
좌절, 실망, 모욕, 상실, 상처가 필연적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쉽게 안 변해."

다음에 올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절망적인 이야기는 없다.
그림책은 부지런히 속삭인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야. 더 자유롭게 비틀고 꿈꾸렴.

너에겐 이곳을 더 좋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

 

 

 

그림책은 한 번도 권력을 가져본 적 없는 존재(어린이)를 심장에 품은 매체다.
한 인간의 가장 취약한 시절을 지키는 책이다. 회화와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지만, 
"순수-비순수"라는 예술의 이분법 구조 안에서 

오랫동안 지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다 최근 재평가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세계는 위계를 모르는 여리고 느린 존재와 속도를 맞출 줄 안다.
작고 사소한 것과 순간의 숨결에 감탄할 줄 안다.
그림책의 너른 품 안에는 온갖 아웃사이더들이 모여 산다.
기득권의 논리에서 비켜선 사람들. 마음을 자주 다치면서도 
다른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앞으로도 이들의 목소리가 담장 너머 저 먼 곳까지 나아갔으면 좋겠다.

 

 

- 책 본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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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권윤덕, 소윤경, 이수지, 유설화, 고정순, 이지은, 유준재, 
노인경, 권정민, 박연철까지 총 10명의 한국인 그림책 작가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으로서 
10명의 외국인 그림책 작가들을 인터뷰했던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2016년 10월 출판)"의 후속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017년 10월에 이 책의 전작인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상당히 재미있고 인상 깊게 읽었기에 리뷰 글을 쓰기도 했다.
(이번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도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읽게 된 것이 이유였다는.;;;)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리뷰]
artistyang83.tistory.com/415

 

전작과 대동소이한 책으로서 인터뷰를 한 작가도 전작과 같은 10명이고 
담긴 내용 또한 전작과 마찬가지로 좋은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책에 수록된 작가들에 대한 정보가 없더라도 읽는 데 별다른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전작에서도 알고 있었던 작가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이번 책에서도 알고 있었던 작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나처럼 작가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는 
작가들의 작품을 알고 있거나 보신 분들이 책 내용을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림 등 예술 관련 전공자뿐만 아니라 예술 활동에 관심이 있으신 
일반인분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긴 한데 
작품 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나 작가 데뷔 이전 이야기 등 무난한 내용들도 있지만 
성찰이나 고찰을 하게끔 만드는 내용들도 많아서 읽는 이에 따라서는 
책 내용들이 약간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창작 활동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 공부를 하고 계시는 분들이라면 책을 꼭 읽어보길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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